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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1회 (1994년 1월)

수상작 6편 · 출품 후보작 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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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6편

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8편

한국기자상) 촛불사건 몰아주기 배당 및 이메일 사태…
촛불사건 몰아주기 배당 및 이메일 사태 김연국 기자(MBC) 2008년 가을, MBC 법조팀은 짤막한 제보 하나를 받았다. "서울중앙지법에서 촛불집회 사건들을 특정 판사에게 몰아 줘 형사 단독판사들이 크게 반발했다." 이 단 한 문장의 제보에서 취재가 시작됐다. "민감한 정치적 사건을 판사 한 명에게 모두 배당했다면, 더구나 젊은 판사들이 집단 반발까지 했다면..." 이건 큰 기사다 싶었다. 그러나 벽은 두터웠다. 법원 내부의 누구도 금시초문이라며 그런 일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수많은 제보들처럼 그 제보 역시 확인불가, 취재보류로 묻힐 것만 같았다. 첫 실타래는 넉 달 뒤 술자리에서 풀렸다. 2009년 2월 초 용산참사 사건 취재로 한창 달아올랐던 법조 기자실은 법원, 검찰의 인사철을 맞아 모처럼 숨을 돌리고 있었다. 법원을 출입하던 이정은 기자는 인사를 앞두고 곧 서울을 떠날 예정이던 판사 한 명과 늦은 밤까지 송별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기운이 오르자 판사는 입을 열었다. "이제 떠나게 됐으니 말하죠. 작년 가을에 이 기자가 물어 봤던 거 있죠? 그거 다 사실이에요."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됐다. 이정은 기자가 서울중앙지법의 형사단독 판사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다녔다. 그러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 누구도 사건의 전말을 속 시원하게 얘기하는 판사는 없었다.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수백 개의 흩어진 퍼즐조각을 맞추듯 고독한 팩트 싸움이 이어졌다. 법조팀은 "배당이 공정한 재판의 시작"이라는 독일 법학 교과서를 뒤졌고, 이미 법원을 떠난 전직 법관과 법학자들에게 수많은 자문을 구했다. 팩트와 팩트 사이에 끊어진 고리들은 상상력으로 메워 갔다. 그러기를 3주. 이 지리한 작업 끝에 법원 내부에서 어떤 은밀한 사건이 벌어졌는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시국사건에 대한 몰아주기 배당은 군사정권에서나 있었던 일"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상상 이상이었다. 2008년 집시법 야간집회 금지 조항에 대해 위헌심판제청을 했던 박재영 판사는 이듬해 초 옷을 벗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단독 판사들은 이례적으로 전원 물갈이가 됐다. 당시 형사수석부장은 이례적으로 1년 만에 교체가 됐다. 신영철 서울중앙지법원장은 대법관 자리에 올랐다. 이 조각조각 난 단신 기사들이 그 제서야 모두 연결됐다. 우리는 바로 곁에서 모든 걸 보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것이다. 법원 고위층을 만났다. 그는 몰아주기 배당을 시인했다. 그러나 "판사들의 집단 반발은 아니었고 건의를 수용한 거다. 몰아주기 배당은 오랜 관행이고 위법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대법원 수뇌부 역시 이미 판사들의 집단 반발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법원 내부의 일이고 일찍 봉합됐다는 이유로 진상조사를 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법부의 상처는 안으로 곪고 있었다. 2월 23일 첫 보도 이후 사건은 일파만파 커져 갔다. 속보가 계속해서 쏟아졌고 신영철 대법관이 판사들에게 보낸 이메일이 공개됐다. 대법원은 뒤늦게 진상조사에 착수해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 개입이라는 결론을 내렸지만, 신영철 대법관은 면죄부를 받았다. 일선 판사들이 연이어 판사회의를 소집해 반발했지만, 신 대법관은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대법원은 배당 예규는 물론 법원 내부의 관료화, 근무평정, 인사권 전반에 대해 개선을 약속했다. 이 특종기사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판사의 판결에 대해 이념공세와 인신공격, 심지어는 계란투척까지 벌어진 2010년. 왜 우리 헌법은 "사법부의 독립"이 아니라 "법관의 독립"을 규정하고 있는지 다시 자문해 본다. 유난히도 큰 사건이 많았던 2009년, 이 사건에 함께 달라붙어 경쟁하며 함께 기사를 쓴 타 언론사 법조 기자들에게도 연대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민감한 기사를 끝까지 지켜내고 방향을 잡아준 당시 법조팀장 이호인 선배를 비롯한 MBC 동료, 선배 기자들에게도 특별한 감사 인사를 드린다.
한국기자상)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경향신문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홍진수 기자 (경향신문) 알고 싶었다. 독자들에게 알려주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알고 싶었다. 도대체 지난해 금융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지난해 가을 전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마침내 폭발했다. 1997년 IMF 경제위기와 달리 지난해 금융위기는 바로 현실적인 위기가 됐다. 나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많든 적든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큰 욕심 없이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가 모두 어렵다는 설명만을 주워들을 수 있었다. 지난해 11월초에 연재를 시작해 올해 9월말에야 끝난 경향신문의 연중 기획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는 이런 사람들의 의문을 풀어주기 위해 시작됐다. ‘글로벌 금융위기’라고 하는 ‘태풍’이 어디서 시작됐고, 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지 독자들에게 알려줘야 했다. 그리고 이런 위기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안’을 찾아보고 싶었다. 리만브라더스 등 세계 굴지의 금융기업이 파산을 시작한 지난해 9월 특별취재팀이 구성됐다. 취재팀은 쉽게 금융위기를 야기한 ‘범인’을 찾아냈다. ‘신자유주의’였다. 시장의 힘을 맹신하고, 경쟁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는 신자유주의가 금융위기의 배후에 있었다. 인간의 탐욕이 적절하게 제어되지 못하고 시장으로 쏟아져 나온 결과였다. 80년대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전세계에 전파했던 신자유주의가 30여년 만에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시리즈는 크게 전편과 후편으로 나뉘었다. 1~3부는 현재 금융위기가 벌어지고 있는 아이슬란드와 미국 금융가의 모습,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보급된 영·미식 경쟁시스템이 우리 삶에 미치고 있는 해악을 독자들에게 보여줬다. 기사를 연재하면 할 수록, 교육, 노동, 환경, 복지 등 우리 사회에 독버섯처럼 들어와 있는 ‘경쟁주의’의 모습이 생생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4~6부에서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하나’를 독자들에게 보여주려했다. 4부 등에서는 스웨덴의 의료, 핀란드의 교육, 네덜란드의 노동 등 경쟁을 어느 정도 배제하고 인간답게 살아가는 ‘다른 사회’를 취재했다. 그리고 5부와 6부에서는 깨어있는 시민의식이, 정치 참여가, 이들의 삶을 바꾸었다는 결론을 얻어냈다. 이제는 쉽게 돌아보지만, 취재부터 기사작성까지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취재에 앞서 기자들은 생소한 경제용어부터 하나하나 다시 공부했다. 국내 전문가들을 찾아가 도움을 청하고 해외 전문가들에게는 이메일로 자문을 구했다. 생생한 케이스를 기사화하기 위해 국내와 해외를 가리지 않고 사람을 만났다. 리만브라더스가 파산한지 어느덧 1년이 넘었다. 시리즈 연재 시작 때 ‘기로에 서있 던’ 신자유주의는 아직도 그 자리에 있다. 그리고 우리사회는 여전히 경쟁을 신봉하고, 시장을 맹신한다. ‘기로에 선 신자유주의’ 시리즈가 이런 삶의 방식을 바꾸는 작은 단초라도 됐기 바란다.
한국기자상) 노동OTL 연재기획 한겨레
노동OTL 연재기획 안수찬 기자(한겨레21) 지난해 여름, 우리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몰랐다. “노동에 대해 한번 취재해 보자” “직접 취업해서 일해 보면 어때” “하루 이틀 말고, 적어도 월급 받을 때까지, 똑같이 먹고 자고 입는 게 좋겠어” 그것이 거대한 삶의 무게를 다루는 일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노동은 오래된 문제다. 그러나 언론에 등장하는 노동은 ‘화장한’ 얼굴이다. 통계청이나 노동부에서 내놓는 보도자료가 있다. 거기서 노동은 숫자로 화장을 한다. 아주 가끔 노사분규가 일어난다. 거기서 노동은 쟁의와 협상으로 화장을 한다. 기자는 숫자를 분석하거나 파업 현장을 둘러본 것으로 노동에 대한 취재를 마친다. 기자도 독자도 노동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한다. 실업자가 늘고 임금은 줄고 비정규직만 양산된다는 것쯤 누군들 모르겠나 생각한다. 그런데 정말 알고 있나? 그 질문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임인택 기자는 반월공단 난로 공장에 취업했다. 그는 “침묵 노동”이라고 기사에 썼다. 일하는 자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임지선 기자는 서울의 갈빗집에 취업했다. 그는 “감정 노동”이라고 기사에 썼다. 일하는 자들은 제 감정을 숨기고 꾸몄다. 전종휘 기자는 이주 노동자들과 함께 마석 가구 공장 컨테이너에서 살았다. 그는 “닫힌 노동”이라고 기사에 썼다. 일하는 자들은 공장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안수찬 기자는 서울 대형마트에 취업했다. 그는 “히치하이킹 노동”이라고 기사에 썼다. 일하는 자들은 하찮은 직업을 갈아타며 평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숫자가 아니다. 강력한 구호도 아니다. 복잡한 정책은 더구나 아니다. 다만 기사로 옮기는 것조차 불편한 현실이다. 가난한 노동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들의 부모와 자식은 왜 가난한 노동자인가. 그들은 왜 아무 말 없이 감정과 의견도 숨기고 닫힌 세계를 인내하는가. 노동의 문제를 구조와 제도로 치환하지 않고, 정책적 대안을 공연히 병렬하지도 않고, 오직 그들의 감정과 경험과 일상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데만 애를 썼다. 덕분에 지난해 7월 이후 우리 가운데 누구도 편하지 않았다. 임인택 기자는 말수가 줄었다. 임지선 기자는 밥 먹을 때 식당 아줌마를 재촉하지 않는다. 전종휘 기자는 엄지손가락에 못이 박히는 산재를 입고 수염이 덥수룩해져 돌아왔다. 안수찬 기자는 아직까지도 구운 고기를 먹지 않는다. 누군가 대안을 물었다. “노동자들이 편하게 공장에 출근할 수 있는 통근 버스를 마련해주는 것”이라고 임인택 기자는 답했다. 그 버스 안에서 노동자들은 쉬고, 생각하고, 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이 대안이다. 고된 취재 끝에 우리는 작은 혜안을 얻었다. 다섯 달 동안 박용현 편집장 이하 ‘한겨레21’의 모든 기자들이 공장에 취업한 우리의 빈자리를 메웠다. 노동에 대한 탐사취재, 내러티브 기사작법, 5개월에 걸친 장기 연재, 1천매에 이르는 방대한 보도, 4차례에 걸친 표지 편집 등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노동 덕분이었다. 아직 부족함이 많은 기사를 칭찬해준 심사위원들께 감사드린다. 그래도 ‘한국 기자상’이란 격려가 너무 과분한 게 아닐까, 속으로만 생각해본다. 더욱 정진하라는 뜻으로 알고, 올해도 탐사보도 열심히 하겠다.
한국기자상) 전자발찌 1년 <내 아이는 안전한가?>
전자발찌 1년 <내 아이는 안전한가?> 박진영 기자(KBS) 올해로 기자생활을 시작한지 만으로 꼭 10년이 됐다. 10년 만에 처음 한국기자상을 받게 되니 기쁘고 영광스러운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마음 한쪽으로는 어린 아이들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으로 상을 받게 됐다는 것이 미안하고 죄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피해자 가족들의 아픔을 방송으로 이용했다는 괜한 자책감에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하지만 KBS의 방송으로 피해가족들의 인권이 좀 더 나아지고, 앞으로 잠재적 피해자가 줄 것이라는 굳은 믿음으로 위안을 삼아본다. 나영이 아버지를 처음 만난 것은 무더위가 한창이던 지난해 7월 말쯤으로 기억된다. 8살 딸이 입었던 참혹한 상처를 떨리는 목소리로 털어놓던 아버님의 수척한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증언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인터뷰 현장에 같이 있던 촬영기자와 스텝들의 가슴도 충격으로 물들었다. ‘이렇게 가슴 아픈 내용을 방송을 통해 전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갈등도 방영 전까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결국 아버님의 적극적인 결단에 힘을 얻어 나영이의 사연은 9월 첫 방송됐고, 국민들의 분노를 이끌어 냈다.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면 안 된다’면서 나선 그 분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시사기획 쌈의 <아동 성범죄 보고서>는 그냥 많은 시사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남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나영이 사건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욱 더 참혹한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범죄자로 돌변할 수 있고, 아니면 그야말로 ‘묻지마 식 범행’으로 인해 어린이와 그 가족의 인생이 송두리째 짓밟힐 수도 있다. KBS의 방송 이후 아동 성범죄 건수가 그나마 줄었다는 경찰청 통계도 있었지만, 그걸로 위안을 삼기는 이르다. 아동 성범죄의 경우 신고되지 않은 이른바 ‘암수범죄’의 비율이 90% 이상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통계는 믿을 것이 못된다. 지금 국회에는 아동 성범죄와 관련해 수십 건의 법안이 올라가 있다. 아동 성범죄의 예방에서부터 발생, 검거, 처벌, 피해자 보상에 이르기까지 손봐야 할 부분이 한 두 개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이 문제는 높으신 분들의 관심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 이 자리를 빌려 정치권과 관련 당국에게 재차 묻고 싶다. 이번에도 ‘말잔치’로 끝낼 것인가? 여러 국정 현안도 중요하지만, 내 자식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대책 마련에 나서주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제2의 나영이 가족은 끊이지 않고 생길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신분노출의 위험을 무릅쓰고 KBS의 취재에 응해주신 피해자 가족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한국기자상)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오류, 인권을…
국립과학수사연구소 감정오류, 인권을 말한다 박재형 기자(대구MBC) 어느 날 한 50대 사업가가 꺼낸 한 편의 영화 같은 제보. 경찰과 검찰, 법원이 국과수 감정을 맹신한 나머지 잘못된 결과를 도출해 억울한 옥살이를 했다는 내용이었다. 방대한 분량의 자료를 보여주며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하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래서였을까? 나도 모르는 사이 취재는 이미 시작됐다. 국과수가 눈도 꿈쩍하지 않을 거니까 아예 포기하라는 주변의 충고를 뒤로하고... 한달 간 사전 취재를 하며 국과수의 도장 감정이 이번 사건의 결정적 증거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국과수가 우리를 상대라도 해줄까?’ 덜컥 걱정부터 앞섰다. 초동 수사를 한 경찰은 국과수 감정 결과가 잘못될 리 없다며 자신만만해했다. 평소 친분이 있는 경찰들도 국과수의 감정을 절대 뒤집을 수 없다며 취재를 만류했다. 더욱이 내가 기댈 곳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사설감정원 뿐 이었다. 사설감정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확인하고 또 검증을 했다. 국과수 감정을 ‘재감정’하는 과정은 그렇게 길고도 험난했다. 본격적인 보도가 이어지면서 국과수 측이 대구MBC를 방문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며 감정오류를 시인하자, 비로소 그간 취재를 하면서 쌓였던 불안감을 씻을 수 있었다. ‘국과수 문서감정 체계 개선’을 골자로 한 대책 안을 손에 쥐던 날은 흥분된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난 6년을 돌이켜봐도 이번만큼 마음고생을 많이 한 적이 없었다. 6개월간 취재 기간 중 우여곡절이 참 많았다. 문제가 된 당좌수표의 번호가 잘못됐다는 경찰 측의 주장이 나와 취재가 무산될 뻔했고, 사실 확인을 해달라며 보낸 협조 공문에 대해 국과수가 무관심으로 일관해 취재가 막혀버린 때도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취재진 스스로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진실은 두 개일 수 없었다. 지역 언론으로서 국과수의 전 방위적인 대책과 쇄신의지를 이끌어 낸 점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억울한 사연들은 경찰서와 검찰, 법원 앞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거다. 이번 수상은 그런 ‘불편한 진실’을 밝혀달라는 외침에 더 낮은 자세로 귀 기울이라는 질책과 격려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작년 이맘 때 제40회 한국기자상 취재후기를 쓰며 ‘이런 순간이 다시 찾아올까?’라는 생각을 했었다. 부족한 점이 너무 많은 나에게 이런 큰 상을 두 번이나 주신 심사위원들에게 넙죽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취재 기간 몇 번이나 포기하고 싶은 마음에 흔들리던 내 마음을 다 잡아주며 함께 고민하고 최선을 다한 이동삼 카메라 기자, 언제나 곁에서 큰 힘이 되어 준 도성진 기자, 국과수 취재의 단초를 제공해주신 오태동 선배님이 있었기에 이 모든 게 가능했다. 끝으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응원해준 대구MBC 식구들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리고 싶다.
한국기자상) 한센병 백년 특집 다큐멘터리 <100年의…
한센병 백년 특집 다큐멘터리 <100年의 참회록> 정길훈 기자(KBS순천) 지난해 전남 고흥 소록도와 고흥 녹동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였다. 이 다리의 이름은 소록대교. 소록대교는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됐던 한센인과 비한센인의 화합, 소통을 기원하는 상징물로 언론에 소개됐다. 하지만, 지난해 1월 데일리 아이템을 취재하기 위해 소록도를 찾았을 때 한센인들이 전한 현실은 달랐다. 소록대교에는 차도만 있을 뿐 인도가 없어서 한센인들이 차량을 이용하지 않고는 다리를 건널 수 없었고, 소록대교 자체도 소록도의 허리를 관통하도록 설계돼 병원 관계자들마저 ‘폭력적인 다리’라고 불렀다. 소록도에 놓인 다리에 한센인을 위한 배려는 없었던 셈이다. 취재진은 소록도병원의 한센인 자치회장으로부터 믿기지 않는 얘기도 들었다. 한센인에 대한 단종 수술(정관 절제)이 80년대까지 이뤄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90년대에도 단종 수술을 받은 이가 있다는 것이다. 민주화가 이뤄진 90년대에 한센인 단종수술이라니... 믿기지 않았지만 취재팀은 자치회장을 설득해 당사자를 만났고 이참에 이런저런 얘기들을 엮어서 한센인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보도특집으로 다뤄보기로 했다. 때마침 2009년은 대한민국 근대사에서 한센인 환자들을 본격적으로 치료한 지 딱 100년이 되는 시점이라서 지난 백 년 동안 우리사회가 대표적 소수자인 한센인들에게 남긴 씻을 수 없는 상처에 대해 제대로 된 반성문 하나 써보자는 심정으로 임했다. 일반인들은 한센인 요양시설이라고 하면 고흥 소록도병원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설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소록도병원은 1916년 개원했고, 이보다 7년 앞선 1909년 미국인 선교사 윌슨이 개원한 여수 애양원이 우리나라 한센인 요양시설의 효시다. 취재팀은 프로그램에 소개할만한 한센인의 사례를 모으던 중 법무법인 공감의 한 인턴으로부터 80대 한센인 남매인 최남순 최남용 씨의 기막힌 사연을 접했다. 젊어서 한센병에 걸린 남매는 한국과 일본의 한센인 수용시설에 따로따로 수용됐고, 지난 40여년 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거다. 취재팀은 건강이 나빠 거동이 불편한 이들 남매에게 서로의 인사말을 카메라에 담아서 영상으로 들려줬고, 그들의 생생한 인터뷰를 통해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정부의 한센인 강제격리 정책이 한센인과 그 가족의 운명을 얼마나 뒤틀어 놓았는지 고발했다. 취재팀과의 인터뷰에서 아픈 가족사를 꺼내고, 동생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털어놨던 최남순 할머니의 모습은 백마디 내레이션보다 훨씬 더 큰 울림을 남겼다. 취재팀은 소록도에서 92년에 단종수술을 한 송문종 씨의 사연도 비중있게 다뤘다. 송 씨는 단종수술을 한 게 90년대였을 거라고 추측만 할 뿐 기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취재팀은 소록도병원에 사실 확인을 요구했으나 병원 측은 환자 진료기록을 외부인에게 공개할 수 없다며 난색을 표시했다. 취재팀은 마지막으로 소록도병원 측에 단종수술 통계와 명단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해 1992년 송문종 씨에게 마지막으로 단종수술이 시행됐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취재팀은 단종수술 외에도 소록도 84인 학살 사건과 오마도 간척지 사건 등 일제시대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우리 정부가 행한 인권침해의 역사에 대해서도 꼼꼼히 정리했다. 한센인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대한민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과 대만 역시 과거 한센인들에 대한 강제격리라는 아픈 역사를 갖고 있었기에 취재팀은 두 나라의 한센인 요양시설에 대한 현지 취재도 병행했다. 해외 취재를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 대만 아시아 3국이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과 소외라는 과거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있어서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 각국의 온도차도 생생히 드러냈다. 특히, 일본과 대만 정부는 한센인들에 대한 인권침해의 역사에 대해 고이즈미 전 총리와 천쑤이벤 전 총통 등 국가를 대표하는 행정수반이 직접 사과했지만 우리는 그동안 정부 차원의 사과 한 번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켰다. 취재팀은 또 대만에서는 한센인 처녀와 건강한 비한센인 총각이 결혼해 아들 딸 손자 손녀를 낳고 행복한 일가를 이룬 사례를 소개했다.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하고 유전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들 부부는 웅변하고 있었다. 지난해 4월 프로그램이 방송된 지 20여일 후 한승수 전 국무총리가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고흥 소록도병원을 방문했다. 현직 총리로서는 소록도를 첫 방문한 것도 의미가 깊었지만 한 전 총리는 한센인들에 대한 과거 우리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대해 직접 사과해 한센인들에 대한 차별을 바로잡는 데 역사적인 계기를 만들었다. 총리의 사과 한 마디로 지난 백 년 동안 한센인들이 당한 차별과 소외가 일순간에 사라질 수는 없지만 그들의 마음 속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린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센인 보상법의 개정 문제 등 아직까지 과제로 남아 있는 일들도 빠른 시일 내에 원만하게 풀리기를 바란다. 프로그램이 방송된 뒤 기자협회와 인권위 등 각종 단체에서 주는 상을 여러 개 수상했다. 프로그램의 완성도보다는 지난 1세기 우리사회가 한센인들에게 저지른 잘못에 공감하고 이제부터라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당위에 많은 분들이 수긍한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씩 바로잡고 그들과 공존하는 데 프로그램이 일조했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긍지일 것이다. 프로그램 제작에 협조해준 많은 한센인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제작 기간 동안 불평 한 마디 없었던 가족들, 어려운 여건에서도 묵묵히 제작에 공을 들인 촬영기자 서재덕 선배, 박은영 작가 등에게도 감사드린다.
한국기자상) 집중점검 닻올린 낙동강 살리기 사업
집중점검 닻올린 낙동강 살리기 사업 조재형 기자(부산MBC) <집중점검, 닻올린 낙동강 살리기 사업>, 보도 내용과 기획 보도의 제목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았다. 애초 기획 의도가 ‘낙동강 살리기 사업’의 허와 실을 모두 조명해보자는 취지에서였고, 이에 맞게 나름 중립적인 제목이 필요했다. 4대강 사업의 주요 목표인 ‘수질 개선’과 ‘수자원 확보를 통한 가뭄 대비’, ‘홍수 방지’, 거기에 더해 ‘지역 경제 활성화’란, 정부가 내 건 화려한 수사에 무조건 거부 반응을 보일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1편의 보도 내용 모두 ‘실(實)’이 아닌 ‘허(虛)’에 초점이 맞춰질 수밖에 없었고, ‘한편으로 치우친 보도였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또, 사업의 긍정적인 측면도 다뤄야 하는 거 아니냐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기획 의도를 배반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뭘까? 4대강 사업의 구체적인 내용을 알아갈 수록, 정부가 관련법을 무시하고 속도전에 골몰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볼수록, 또 낙동강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중장비에 의해 무자비하게 파헤쳐지는 모습을 직접 확인할수록, 또 4대강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고 눈물짓는 농민들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배반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공사가 이미 본격화된 지난 12월, 지역 언론에서조차 4대강 사업에 대해선 오랫동안 침묵뿐이었다. 사상 최대의 토목공사가 진행되면 지역에 약간이나마 ‘콩고물’이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기대는 4대강 사업의 최대 피해자가 될 수도권외 지역민들을 함정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낙후된 지역경제를 살리는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에, 수 천 년 우리 곁을 흐르며 수백만 시민의 소중한 젖줄이 되어준 낙동강을 희생할 수 있다는 것인가? 대구 달성보와 경남 함안보 공사 현장의 퇴적토에서 다량의 비소가 검출됐다는 소식 등 지금도 4대강 사업 현장에선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다. 언론의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며, 우리의 후속보도도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달의기자상’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눈 것으로도 이미 부족함이 없다. 또 시상식장에서 만난 한겨레 21 전종휘 기자의 ‘아량’으로, 지역에서 이런 ‘기특한(?)’ 보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국에 알린 것만으로도 큰 영광이었다. 그런데 ‘한국기자상’ 수상이라는 과분한 평가까지 받게 되니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짧은 출장 일정 때문에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무리한 촬영 일정이 불가피했지만 함께 웃고 분노하면서 낙동강 현장을 누볐던 박태규 선배와 서낙동강의 시꺼먼 오니토를 김장하듯 손으로 주무르는 솜씨를 뽐내며 기획보도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윤파란, 우현주 기자, 그리고 말 못하는 철새들의 슬픈 사연을 전해준 이두원 선배, 기획보도 내내 빠짐없이 뉴스를 챙겨보시고 조언해주신 선배님들과 수상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한국기자상) 불길에 휩싸인 철거민 CBS
불길에 휩싸인 철거민 한재호 기자(CBS) 벌써 일년이 지났다. 화염병을 손에 든 철거민, 물대포를 쏘는 용역업체 직원, 컨테이너 박스 속 경찰특공대원... 결국 여섯 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마까지 '용산참사'의 그 날 그 곳 남일당 건물이 훤히 보이는 건너편 옥상에서 밤을 지새우며 내 카메라는 모든 것을 지켜봤다. 꼬박 일년이 지났다. 남편을 잃은 아내의 눈물, 동료를 잃은 경찰의 눈물, 아들을 감옥에 보내는 어머니의 눈물, 물러나는 경찰 수장의 눈물... 마침내 열린 장례식에서 흐르는 유가족의 눈물까지 그 날부터 내 카메라에 담긴 사진은 온통 눈물뿐이었다. 설마 일년이 지났다. 참사현장 건너편 옥상을 내려오면서, 시신이 안치된 영안실 앞에서 돌아서면서, 청와대 가는 길을 막아선 경찰 앞에서 오열하는 유가족을 지켜보면서, 매일 밤 열리던 촛불 추모미사의 횟수를 헤아리면서 ,내 카메라에 만 오천여 장의 '용산관련' 사진이 담기는 동안에도 설마 일년이 지날 줄은 몰랐다. 정말 일년이 되어서야 차디찬 냉동고에 갇혀 있던 다섯 명의 철거민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졌고, 얼마 지나 나는 한국기자상 수상 소식을 들었다. 기자상을 안겨준 사진 '불길에 휩싸인 철거민'은 처음부터 논란이 되었다. 참혹했던 타인의 고통을 대중에게 알린다는 명목 하에 선정적으로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따가운 시선과 사진 한 장으로 그날의 참상을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었다는 과분한 평을 동시에 받으며 괴로웠지만 사진기자로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용산참사'를 잊지 않고 묵묵히 지켜보리라는 다짐이었고, 지난 일년 동안 취재한 용산에 대한 나의 기록들이 현장을 찾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전달되어 문제에 대한 조금의 관심이라도 갖게 만들었다면 기꺼이 영광스런 한국기자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갈길 먼 5년차 기자에게 한국기자상이 얼마나 과분한 것인지를 잘 알지만, 사진기자로서 나아갈 머나먼 길에 혹여 나태하거나 무디어지면 이 상이 매서운 채찍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