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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회 (1993년 8월)

수상작 2편 · 출품 후보작 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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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2편

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7편

한국기자상 취재보도 룡천역 폭발참사 특종 후기 연합…
룡천역 폭발참사 특종 후기 연합뉴스 조성대 기자 미국의 세계적인 유력지 뉴욕타임스(NYT)는 작년 4월 북한 기사와 관련해 한국 베이징(北京) 특파원들의 활약상에 두 번 놀랐다. NYT는 한국 특파원들이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공식 방중(4월19∼21일) 기사를 1보 특종에서부터 그의 행적을 시시각각 보도한 것과 관련, "한국 기자들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하거나 누설된 정보를 제보 받는 사람들"이라고 질투 반 비아냥 반의 기사를 게재했다. 이런 NYT가 다음날인 23일 조성대 특파원의 이름까지 인용해가며 연합뉴스의 룡천 폭발 참사 기사를 크게 다뤘다. 더 이상의 비아냥은 없었다. 연합뉴스 국제뉴스국에서 오랜 기간 일하면서 국제 뉴스기사 작성을 AP나 AFP, 로이터 등 서방 통신에 주로 의존하고 NYT, 워싱턴 포스트 등을 하늘같이 우러러 보던 것과 비교하면 정말 천지개벽한 느낌이었다. 그렇다. 베이징에서 해야 하는 중국과 북한 관련 취재에선 한국 언론이 서방 언론에 더 이상 기죽을 이유가 없다. 오히려 주도해 나갈 수도 있다. 덩샤오핑(鄧小平) 사망, 김정일 위원장의 방중, 국군포로 출신 탈북자 첫 귀환, 룡천 참사는 모두 한국 특파원들이 베이징에서 건저올린 특종들이다. 앞으로 베이징에 파견되는 한국 특파원들의 중국어 실력과 중국 이해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져 한국의 중국 내 취재 경쟁력이 점점 강화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국 내 한국 특파원들의 특종은 대부분이 북한 관련이다. 한국 기자들이 여러 면에서 취재에 절대적인 우위에 있기 때문에 일본이나 다른 나라 기자들에게 빼앗기면 오히려 창피한 것이 사실이다. 북한 문제 취재에서 가장 부러우면서도 무서운 것이 일본 특파원들이다. 교도(共同)통신, 아사히(朝日)신문, 도쿄(東京)신문 등 유력매체들은 베이징에 북한 전담 취재 특파원을 두고 있다. 한국어가 거의 모국어 수준인 이들은 대부분 조선족 출신의 보조원을 두고 남북한 대사관은 물론 각종 기관, 단체를 밀착 취재하고 평양을 방문하기도 한다. 베이징은 물론 북-중 국경도시인 단둥(丹東), 조선족이 모여 사는 옌지(延吉) 등에는 수시로 출장을 다녀 현지 소식통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다. 일본 특파원들의 조직적이고 집중적인 북한 취재 노력을 보면 언젠가 북한 관련 특종을 이들에게 빼앗길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몸이 오싹해지고 등에 식은땀 이 흐른다. 일본기자들의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대북 정보수집, 분석능력은 언론차원을 넘어 범정부적이 아닐까 하는 추측마저 들면서 전율은 더욱 심해진다. 베이징에 온지 이제 만 2년 지났다. 날이 갈수록 실감나는 유형 무형의 장벽 속에서 서방 기자는 물론 일본 기자들과의 취재 경쟁에 지지 않기 위해 신발 끈을 바짝 더 조여야할 것이란 생각이 저절로 든다.
한국기자상취재보도 열린우리당 신기남의장 부친은…
열린우리당 신기남의장 부친은 일본군 헌병오장 동아일보 신동아팀 허만섭기자 "(열린 우리당 의장에 취임하며) 친일청산 등 3대 개혁에 주력하겠다", "(친일청산법 개정 관련) 잡초 뽑는데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다", "부친은 일제시대 교사로 재직하다 광복 이후에 국립경찰 1기로 경찰에 투신했다", "무슨 근거로 일제시대 때 경찰 간부를 했다고 언론이 보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에 해당되는 것 같다." 2004년 상반기 신기남 당시 열린 우리당 의장이 했던 말들이다. '집권여당 대표가 부친의 친일 행위를 숨기면서 친일 청산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는 의혹은 시간이 좀 들더라도 사실관계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는 사안이라고 봤다. "신 의장 부친 신상묵 씨가 일본 경찰로 복무했다"고만 돼 있는 인터넷 글의 최초의 출처를 찾는데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90년대 말 한 지역신문에 실린 연재물에서 따온 내용임을 확인했다. 수소문을 해 작가를 찾았다. 그로부터 "신의장 부친 신상묵씨는 일본 경찰이 아닌, 일본군 헌병 오장이라는 증언을 들었으나 고인의 명예를 생각해 경찰로 썼다"는 증언을 들었다. 신 의장이 위험한 블랙코미디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더 들어가 보기로 했다. 전국 각지에 생존해 있는 89∼91세의 신상묵씨의 대구사범 동기생 10여명을 찾아, 그들로부터 신상묵씨의 일본군 헌병 오장 경력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헌병 오장 군복을 입은 신상묵씨가 내게 찾아와, 징병기피자를 쫓고 있는데 정보를 가르쳐달라고 부탁했다"는 말도 있었다. 이어 신상묵씨가 '시게미쓰 구니오'로 창씨개명한 일제시대 자료, 신상묵씨가 일본군에 자원 입대했음을 증명하는 일본군지원병합격자명단, 일본군지원병 수료생 신분의 신상묵씨가 입대소감을 밝힌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인터뷰 기사, 신상묵씨의 신상명세가 있는 조선총독부 직원록, 신상묵씨가 일본군 출신임을 보여주는 대구사범 동문회보 등 관련자료를 입수했다. 이후 일제 말기 조선의 교사-군인 양성 제도 및 지원병-징병제도 등 당시 사회 제도를 알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7년 치 '매일신보'를 4일에 걸쳐 꼼꼼히 구독했다. 일본군 편제를 전공한 몇 안 되는 전문가들을 찾아 자문도 받았다. 이어 신상묵씨 주변인들의 증언을 수집함으로써 학교 졸업 이후 광복 때까지 신상묵씨가 걸어온 이력을 한 해도 빠짐없이 재구성할 수 있었다. 보도 후 많은 국민들이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정치 지도자들에게도 메시지를 던졌다. 국가 지도자가 중대한 진실을 감춘 채 국정을 운영할 경우 응분의 책임을 지게된다는 경고였다.("신 의장의 퇴진은 정치의 진전을 알리는 사건으로 기록될만 하다. 앞으로 두고두고 거울로 구실해야 한다."-한겨레) 신 의장 부친으로부터 고문을 받았다는 독립운동가들도 자신을 고문한 사람이 누군지 찾게 되어 평생의 한을 풀었다고 말했다. 국장단과 데스크는 더 확실한 증거, 더 완벽한 기사를 갖고 오라고 요구했다. 취재가 끝나서는 "신 의장이 허심탄회하게 부친의 경력을 얘기한다면 특종을 포기하더라도 '신 의장의 솔직한 고백' 쯤으로 기사 방향을 잡자"고 했다. 기사 마감 4일 전부터 당사자인 신기남 의장에게 핵심적 취재내용을 알려주면서 여러 차례 설명을 요청했으나 신 의장은 측근을 통해 종전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신동아 기사가 알려진지 2시간 뒤 신 의장이 부친의 일본군 복무 사실을 시인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씁쓸했다. '잘 만들어진 잡지'라는 평가를 듣기 위해 함께 고생하는 동아일보 출판국, 신동아 식구들에게 영광스런 상을 받게 된 공을 돌린다.
한국기자상 기획보도 예산대해부, 나라살림이대론 안…
예산대해부, 나라살림이대론 안된다 경향신문 권석천 기자 "국민 혈세로 꾸려지는 예산이 어떻게 편성되고 집행되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다뤄진 적이 없다. 언론이 도전해야 할 과제다" 조용상 사장의 주문이 편집국 차원의 공감대를 얻으면서 지난해 8월초 특별취재팀장을 맡으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하지만 좀처럼 엄두가 나지 않았다. 6∼7개월간 대형 시리즈물을 이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아이템 선정과 취재 방법 등 A부터 Z까지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다른 언론사들이 어떻게 다뤘는지 추려봤다. 결론은 전인미답의 길. 4, 5회 이상 나간 시리즈를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은 수풀을 헤치며 스스로 길을 만들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예산 감시 시민단체인 '함께 하는 시민행동'과 공동 기획을 통해 자문을 받기로 했다. 그러나 역시 "예산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인식을 뚫고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선 생생한 케이스를 발로 뛰어 찾아내야 했다. 조현철, 정유진 기자와 함께 감사원 감사결과, 국회 예 결산검토 보고서, 예산정책처 분석 등 수천 쪽에 달하는 자료를 고시공부 하듯 파들어 갔다. 동시에 각 지역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광범위한 '제보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한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전원 출근해 읽고, 토론하고, 취재하고, 쓰고, 지우고를 계속한 결과 30회 가량의 아이템이 짜여졌다. 본격 취재와 시리즈 게재에 들어가기 앞서 두 가지 원칙을 정했다. 우선 제보자는 물론 주민, 담당 공무원 등 최대한 많은 관련자들을 만나고 해명까지도 최대한 반영하자는 것. 시리즈 목적이 예산 문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을 높이는 동시에 정부의 자세 변화를 이끌어내는데 있는 만큼 한건주의보다는 총체적인 실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또 ENG 카메라가 현장을 흝듯이 현장 르뽀 방식으로 실태를 고발한 다음 구조적인 문제점과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화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막상 취재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수십 년 묵은 관료들의 `내부 논리'와 싸우는 일이었다. 말도 안되는 변명도 있었지만, 그럴싸한 논리도 적지 않았다. 해당 공무원의 해명을 듣고 나면 전체 기사의 틀이 흔들리기도 했다. 다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내부 토론을 수없이 벌인 끝에 한발 두발 나아갔다. 시리즈가 계속되면서 예산 감시 운동에 불이 붙었다. 특히 수해복구비가 엉뚱한 다리를 짓는데 쓰인 '속초 노리교'와 완공되자마자 무너져 내린 '태백 상장∼소도간 4차선도로' 보도는 지역 시민단체들의 진상 규명 운동을 이끌어냈다. 국회 국정감사와 예결위 심의에서도 시리즈 보도들이 주요 쟁점으로 다뤄졌다. 무엇보다 기분이 좋았던 건 한 대학의 재정학 교수가 "시리즈를 책으로 내면 교재로 쓰겠다"고 알려왔을 때였다. 한국기자상이란 큰 영광을 안았지만 개인적으론 아쉬움도 적지 않다. 그러나 젊은 후배들과 함께 부대끼면서 새로운 취재 영역을 개척했다는데 무한한 자부심을 느낀다. 이제 예산 분야에도 언론인들의 수많은 발자국이 생기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10년 후 누군가 "2004년에 무엇을 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자랑스럽게 예산의 좁은 갱도를 통과하고 있었노라고 말할 것이다.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조용상 사장과 김지영 편집인, 이영만 편집국장, 서배원 경제부장 등 선후배 동료, 그리고 "이건 예산낭비 아닙니까"하며 제보전화를 해주신 독자 여러분들께 이 상을 바친다.
한국기자상 기획보도 피고 대한민국 - 국유지 반환 소…
취재후기/피고 대한민국 - 국유지 반환 소송의 진실 SBS 유희준 기자 유난히 무더웠던 지난해 여름. SBS 시사보도 프로그램 뉴스추적은 3백회특집을 앞두고 있었다. 뉴스추적 프로그램이 첫 방송을 시작한 지난 97년 7월 이후로 7년을 넘긴 시점에서 준비하는 특집물이라 프로그램 준비부터 부담이 적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2년 전에도 '뉴스추적' 2백회 특집도 맡아 故최종길 교수 의문사 사건을 다뤘고, 방송 이후 한국방송대상까지 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지만 특집물을 준비할 때면 항상 큰 부담과 스트레스를 받게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데스크는 3백회특집 방송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아이템을 고르고 또 고르다 보니 사전 취재에만 한 달이 넘게 소요됐다. 심지어 사회지도층 인사와 고위직공무원들 일부가 新행정수도 후보지인 충남 연기, 공주지역에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제보를 받고 거래 내역 2만 여건의 행적을 추적해보기도 했다. 결국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고 숨까지 턱턱 막히는 땡볕에 충청도 일대를 헤매고 다니다 일광성 피부염에 걸리기도 했다. 담당의사는 뜨거운 햇빛에 안면이 과다하게 노출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아테네 올림픽 덕분에 정규방송이 연기되면서, 평소 프로그램제작 때 보다 시간을 좀 더 벌기는 했지만, 특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만한 아이템을 찾지 못하던 상황에서 마감시간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획회의 때 8.15 광복절 직후에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만큼, 친일파의 행적을 추적해보자는 의견이 제시됐다. 그러나 친일파와 관련해서는 이미 다른 언론사에서 여러 차례 다뤘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이 가질 않았다. 그런데 친일파와 관련된 방송이나 기사들을 검토해보면서 토지와 관련된 기사가 유난히 많은 사실에 주목했다. 가령 친일파 송병준이 애국지사 민영환의 땅을 뺏었는데, 그 후손들이 소유권 반환소송을 냈다든지, 아니면 매국노 이완용의 후손이 땅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보도 등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친일파 후손들이 토지 소송에서 승소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기본적인 의문에서부터 이번 특집물이 기획되고 시작됐다. 우선 후배인 진송민 기자에게 역사학자들을 만나 관련 소송의 배경과 이면을 취재해보라고 지시했다. 취재가 진행되면서 친일파들의 토지 소송은 그야말로 새 발의 피라는 사실을 알게됐다. 놀라운 것은 일제 때 토지 관련 공문서 상당수가 해방 이후 혼란과 한국전쟁을 틈타 멸실 되거나 소실됐다는 점이었다. 이른바 토지브로커들은 그런 점을 악용해 친일파의 땅은 물론이고 국가가 소유권을 갖고 있는 토지에 대해서도 소유권 반환소송을 제기하고 있었고, 이런 소송은 지난 80년대 후반부터 경기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늘고 있다는 사실을 포착해내는 데 성공했다. 취재결과 피고가 대한민국인 국유지 관련 민사소송은 한해 평균 무려 1천 4백 건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수 조원이 넘는 국유지 반환 소송에서 국가 패소율은 무려 40%선. 한 건에 몇 십 억 원에서 많게는 1천 억 원이 넘는 국가재산이 걸린 소송이 잇따르고 있지만, 국가의 대응은 허술하기만 했다. 이런 국유지 관련 소송을 전담하는 검사는 전국에 10명도 안됐다. 국유지 관련 소송에 허술하게 대응하는 동안 국민의 재산인 국유지가 토지브로커 일당들에게 야금야금 떼먹히고 있었던 것이다. 취재진은 어렵사리 토지관련 소송기록일체를 입수하고 전면적인 확인작업에 들어갔다. 제작진은 더 나아가 국유지 반환 소송의 배후에 숨어있는 토지 브로커들을 추적, 고발하는 데 주력했다. 후일담이지만, 소송과 관련된 토지관련 공문서 위,변조 사건은 취재진이 깊이 파헤쳐 들어갈수록 의문과 의혹이 증폭됐고 취재진의 긴장과 관심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들어줬다. 2달 넘게 지속된 취재내용은 토지 브로커 일당의 의혹을 고발하고 국유지 관리 대책을 촉구하는 내용으로 정리해 방송을 무사히 마치게 됐다. 방송 이후 검찰은 해당 사건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를 벌였고, 공문서를 위,변조한 일당과 토지 브로커 일당 6명을 구속 기소하는 성과를 냈다. 제작 과정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기억은 走馬看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기억에 남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일제 과거사 청산과 관련해 여러 가지 일들이 산적해 있지만 토지대장과 제적(호적)관련 공공 기록조차 허술하게 관리돼왔다는 문제점을 파헤쳤다는 점이 무엇보다 큰 보람으로 남는다.
한국기자상지역기획보도 우리곁의 빈곤 부산일보
'우리곁의 빈곤' 부산일보 특별취재팀장 안병길 내가 공공저널리즘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쯤이다. 논문 자료를 준비하다가 우연히 공공저널리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동체 저널리즘' '새로운 언론실험' 이라는 이 프로젝트가 미국 언론계와 언론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면서 파급되고 있단다. 언론이론 이기도 하고, 동시에 혁신적인 취재보도 기법이라. 귀가 솔깃해졌다. 힘있는 유력 언론이 아니라 지방언론의 언론개혁운동이라는 점이 나의 구미를 더욱 당기게 했다. 그래 바로 이거야, 지방언론의 패러다임을 바꿔 놓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공공저널리즘이야. 공공저널리즘은 한마디로 행동하는 언론이요, 실천하는 언론이다. 언론이 사회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힘을 합쳐 문제해결에 직접 발 벗고 나선다. 그래서 공공저널리즘은 시민언론, 대화저널리즘, 쌍방향저널리즘, 문제해결저널리즘이라고도 불린다. 2001년 여름 미국으로 날아갔다. 미국 언론사에서 날로 확산되고 있는 공공저널리즘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것을 한국언론에 적용하려는 야심(?)때문이었다. 1년 뒤 귀국해서 이론과 프로젝트 사례연구 결과를 책으로 펴냈다. 사회부장 발령을 받아 드디어 프로젝트를 실천할 기회를 잡았다. 특별취재팀을 구성하고 자세한 프로젝트 기획안을 짰다. 지방언론으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언론재단의 기획취재지원금도 받아냈다. 김영종교수님이 이끄는 경성대 사회복지학과 팀과 부산남구사회복지관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등이 합류를 했다. 주제는 빈곤 중에서도 그동안 우리사회나 정부가 한번도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던 차상위빈곤계층에 맞추기로 하고, 프로젝트명을 '우리곁의 빈곤'으로 정하였다. 프로젝트는 2003년9월부터 2004년 9월까지 장장 1년 동안 진행되었다. 시리즈기사 21회, 관련 일반 기사 23회 등 보도물만 총 44회에 이르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특히 2단계에서는 공공저널리즘의 핵심인 '부산복지전화네트워크'라는 사단법인을 설립하였다. 법인은 한국 최초로 빈곤응급전화인 051-888-8888번을 개통, 24시간 빈곤층들의 상담전화를 받고 이들을 필요한 사회복지기관과 연결시켜 주는 '빈곤층의 친구이자 해결사' 역할을 하고 있다. 취재팀은 그동안 정부지원 등 사회보호에서 소외돼 있던 '차상위 빈곤계층'의 문제를 꺼집어내 사회이슈화 하고, 정부와 사회의 대책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특히 본 프로젝트가 언론보도 과정에 시민과 지역사회를 보다 많이 참여시키고 언론과 지역사회가 지역의 문제점을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결하는 새로운 언론모델을 선보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두고 싶다. 또한 이러한 보도 프로젝트가 다른 언론사로 확산돼 한국 언론의 보도방식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한국기자상 지역기획보도 섬3부작 목포MBC
섬 3부작 목포MBC 박영훈 기자 하나님께 먼저 감사 드린다. 어릴적 고향 섬마을에 다니던 여객선은 육지에서 꼬박 10시간이 걸렸다. 목포를 출발해 진도 팽목을 거쳐 조도, 옥도, 관사도, 대마도, 소마도, 관매도, 동거차도.... 그리고 서거차도. 완행버스처럼 어찌나 많은 섬을 들르던지 가끔은 힘들곤 했지만 방학을 맞아 찾아가는 여객선 종점, 섬고향은 설렘이었고 기쁨이었다. 벗어난 줄 알았던 섬을 다시 만나건 5년 전부터다. 목포MBC뉴스를 통해 매주 금요일 아침 섬과 섬사람들의 얘기를 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북적대던 섬마을은 추억에나 남아 있었다. 아이들 울음소리 끊기고, 아침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굴뚝은 막힌지 오래였다. 5,60대가 막내인 섬은 그나마 나았다. 대부분 7-80대의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 어른의 말을 빌리자면 '발잘린 문어처럼' 오도 가도 못한 채.... 우리나라는 3천 개가 훨씬 넘는 섬이 있고, 이 가운데 62%가 전남에 몰려 있다. 섬과 섬사람들의 얘기를 더 늦기전에 기록해보자는 취지에서 '섬 3부작'은 제작됐다. 바다위에 섰던 어시장 '파시'를 통해 번창했던 섬의 과거를 11가구가 모여 사는 외딴섬 독거도를 통해 섬의 현재를 일본과 우리나라 섬 정책비교를 통해 섬의 미래를 생각해봤다. 한편의 프로그램이 엄청난 변화를 불러올 수는 없겠지만 모든 이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이런 기회를 마련해준 한국기자협회, 한국언론재단, 심사위원 여러분께 뭐라 고마움을 전해야할지 모르겠다. 보도제작국 식구들과 3년 동안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애써준 순용선배, 경찬선배, 너무나 열심히 촬영해준 재필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일은 또 섬으로 가련다.
한국기자상사진보도 오빠.... 한겨레
오빠....... 한겨레 이종근 기자 글을 쓰기 앞서 먼 이국땅에서 홀로 고통스럽게 힘든 인생의 무게를 견디다 먼저 우리의 곁을 떠난 고 김선일씨의 명복을 빈다. 또한 이 사진으로 평생 아물지는 않겠지만, 어느정도 그때의 고통에서 벗어나, 힘들지만 열심히 살아갈 가족들에게 또 다른 아픔을 주는 것이 아닌지 미안할 뿐이다. 일주일 동안 취재를 핑계로 가족들에게 폐를 끼친 점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죄송함을 표한다. 기자가 되겠다고 생각한 뒤로 언젠가는 꼭 한번은 받고 싶은 상이었다. 그 시기가 너무 빨리 내게 온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앞선다. 자만하지 말고 더욱 열심히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이상을 받는데 있어 많은 도움을 준 한겨레 사진부원들과 심사위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또한 잦은 출장과 불규칙적인 생활에도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준 아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부모님께도.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다며 공자님은 40세를 가리켜 '불혹'이라 했다. 나도 이제 내일 모레면 40줄에 들어간다. 그러나 지금처럼 기자라는 직업에 대해 고민 해 본적은 없다. 지금껏 살며 남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생각하며 살아온 적 없었다. 타인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며, 사촌이 땅을 산다고 해도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며 살고 싶은 나였다. 이런 내게 있어 작년은 평생 지울 수 없는 한해일 듯 싶다. 아니 나 뿐만 아니라 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통의 한국인들이라면 모두 같은 심정일 듯 싶다. 아마도 2004년에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일은 이라크 무장세력이 자행한 고 김선일씨 납치.살해 사건이 아닐가 싶다. 사진속에 나오는 한분은 이제 우리의 곁에 없다.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은 동생은 한없이 울고만 있다. 그들은 그렇게 거기에 존재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역사의 목격자'라는 거창한 이름아래 셔터만 누르고 있었다. 다만 번쩍거리는 불빛(스트로보)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희미한 촛불과 형광등 불빛에 의존한 채 떨리는 손을 놀린다. 빠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빨리 찍고 자리를 피해주는 것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그때 일로 나는 과분한 상을 받고 글을 쓰고 있다.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어떤 기자가 되고 싶었던지가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량살상무기를 찾는다는 이유로 전쟁을 일으킨 미국은 우리정부에 파병을 요청, 정부는 추가 파병 동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파병 부대의 규모와 주둔지를 놓고 논란이 계속된 끝에, 3600여명의 자이툰부대가 이라크 북부 에르빌에 전개를 완료했다. 이 과정에서 이라크에 진출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이라크 무장세력에 납치돼 6월22일 피살됐다. 아랍계 위성방송인 <알자지라>를 통해서 살려달라고 울부짖던 김씨의 모습은 온나라를 충격에 빠뜨렸다. 어찌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그는 우리에게 커다란 상처를 준 채 우리의 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을 통해 우리나라도 이제 테러로부터 안전할 수 없다는 현실과 제나라 국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는 대한민국이라는 존재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번 사태로 인해 우리국민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존재, 미국과 테러리즘에 대한 이해, 거기에 우리 자신에 대한 성찰을 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가지 바람이 생겼다. 이제부턴 좋은 모습들만 담고 싶다. 모든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전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진을 보여주고 싶다. 그런 사진들이 더욱 빛을 발하는 그런 따뜻한 사회를 만들고 싶다. 거기에 내 작은 노력이지만 최선을 다하고 싶다. 고 김선일씨가 마지막으로 울부짖던 "나는 살고 싶습니다. .... 제발, 이라크에 한국 군인들을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한국에 가고 싶습니다."라는 말이 지금도 귓가에 들리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