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7편
노예 장애인…그 후 JTV전주방송
노예 장애인…그 후
JTV전주방송 하원호 기자
4~5년 전 ‘무슨 무슨 노예’로 포털 검색어 1위에 올랐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수십 년 세월 임금 한 푼 받지 못한 채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개밥만도 못한 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축사에서 지친 몸을 뉘였습니다. 지적장애가 있는 이들을 사람들은 ‘사람’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한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이들의 사연이 소개됐고, 국민적인 분노가 일었습니다. 가해자는 처벌을 받았고, 이들은 장애인 시설로 옮겨졌습니다. ‘무슨 무슨 노예’로 불렀던 이들을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습니다.
그런데 지난 봄, 이 장애인 시설에서 일했던 종사자가 믿기 힘든 얘기를 털어놨습니다. 이곳에서도 장애인들이 부당 노동에 시달리고, 심지어 장애인들이 보상금으로 받아 온 돈마저 가로챘다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 장애인 시설의 운영자는 지역에서도 명망이 높았습니다. 무엇보다 철저한 사실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된 장애인을 만났습니다. ‘수상한 면회’를 눈치 챈 병원에서 시설에 알렸고, 시설 운영자의 회유와 협박이 시작됐습니다. 제보자는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다며 취재진의 전화조차 받지 않았습니다.
강제 노동이 이뤄졌다는 밭과 개 사육장, 박스접기 작업장 등을 파고들었습니다. 장애인들이 오가는 길목에서 부당 노동이 이뤄졌다는 인터뷰도 확보했습니다. 차곡차곡 팩트가 쌓이면서 탈출 장애인이 다시 부당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는 보도가 전파를 탔습니다.
결국 첫 보도가 나간 지 열 하루 만에 시설이 폐쇄됐고, 장애인 30명은 다른 시설로 옮겨졌습니다. 이례적으로 부부가 동시에 구속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새 시설로 옮긴 장애인들이 두 번 다시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길 바랍니다. 또 그렇게 되도록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큰 용기로 진실을 밝혀준 제보자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주신 성지호 보도국장과 전주방송 보도국 식구들, 늦은 귀가에도 불평 한마디 없었던 아내, 사랑하는 아들 단우와 서준이에게 수상의 영광을 돌립니다.
용인 CU편의점주 자살 및 CU측 사망진단서 변조 경…
용인 CU편의점주 자살 및 CU측 사망진단서 변조
경인일보 김선회 기자
갑을관계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5월 16일. 용인에서 CU 편의점을 운영하던 50대 남성이 경영악화로 CU측 직원과 계약해지 문제를 놓고 실랑이를 벌였다. CU 본사 직원은 계약 해지의 대가로 수 천만원의 위약금을 제시했고, 이에 격분한 남성은 수면유도제 40알을 먹고 쓰러져 응급실로 옮겨졌지만 다음날 오전 숨지고 말았다.
경인일보는 지난 5월 21일자 1면에 고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렸다. 이후 CU측은 ‘해당 점포는 매월 수익이 470만원에 이른다’, ‘사망원인은 수면유도제 복용 때문이 아닌, 지병인 심근경색이다’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전국 언론사에 배포했다.
여기서 강한 의문이 들었다. 과연 수면유도제를 다량 복용해 죽은 사람의 사인이 단순히 심근경색이었을까? 유가족외에는 발급받을 수 없는 사망진단서를 CU측은 어떻게 확보한 것일까? 이런 의구심으로 취재를 원점에서부터 다시하기로 했다.
취재진은 유가족들을 만나 CU 고위 간부가 수 천만원의 합의금을 주겠다고 자필로 서명한 ‘확인서’를 확보했다. 또 고인의 병원비 및 장례비를 결제하기 위해 CU 측이 사망진단서를 확보하게 됐으며, 언론에 배포하는 과정에서 사망 원인의 하나인 ‘수면유도제로 인한 약물중독’ 부분을 삭제한 것을 알게 됐다. 이에 경인일보는 5월 23일 CU의 사망진단서 변조 사실을 다시 한 번 전국 최초로 알렸다.
5월 27일에는 유가족과 참여연대가 기자회견을 열고 사망진단서 변조와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홍석조 BGF리테일(CU 본사) 회장을 고발키로 했다. 사태를 감당하기 힘든 지경이 되자 박재구 BGF리테일 사장을 비롯한 임원진은 ‘대국민 사과 기자회견’을 열고 사망진단서 변조 문제를 전적으로 시인했다. 또 향후 유사사건의 재발방지 약속까지 하게 된다.
CU 측이 조작된 사망진단서를 배포해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CU문제를 일단락졌음에도 불구하고, 경인일보 기자들이 후속취재를 통해 CU 측의 유가족에 대한 입막음 시도와 고인의 사망진단서 변조사실을 보도해 대기업의 횡포를 각인시킨 것은 진실 앞에 어떠한 ‘성역과 금기’도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끝으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고인의 명복을 빌며 우리의 기사가 유가족 및 전국의 편의점을 운영하시는 분들께 작은 도움이라도 됐기를 바란다.
의문의 형집행정지 MBC
의문의 형집행정지
MBC 임소정 기자
지난 2002년 부산의 모 재벌기업 사모님이 사위의 이종사촌 여동생 하지혜양을 불륜 상대로 의심해 청부살인까지 저지른 ‘이대 법대생 공기총 살인사건’. 고인의 아버지를 통해 접한 이야기는 믿기 어려웠습니다.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사모님’ 윤 모씨가 감옥 대신 6년 넘게 세브란스 병원 VIP 병실에서 지내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경기도의 한 병원 특실로 옮겨 입원 중인 윤씨를 찾아냈습니다. 세브란스 병원 주치의의 진단서에 따르면 윤씨는 거동조차 불가능한 상태여야 했지만 취재팀이 두 달 가까이 지켜본 결과 멀쩡히 거동도 하고 식사도 하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겉모습으론 불충분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세브란스 병원 내부로부터 주치의의 진단서와 윤씨의 의료기록을 입수했습니다. 진단서와 의료기록의 내용은 달랐습니다. 대한의사협회의 협조를 받아 다른 병원의 전문의들에게 분석을 부탁했습니다. 역시 진단서가 왜곡된 것 같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직접 만난 윤씨는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방송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특히 검찰은 형집행정지 사유를 밝히라는 수십 번의 정보공개청구에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방송이 나간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대검찰청이 형집행정지를 전면 재검토하겠다고 발표한 뒤에도 진단서를 써준 주치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환자들을 진료했습니다. 윤씨의 남편 류 모씨는 언론중재위에 취재진을 고소했습니다.
해결돼야 할 일은 또 있습니다. 방송 사흘 전 서울 서부지검 차장검사는 세브란스 병원에 대외비 공문을 보내 지난해 형집행정지 연장 당시 윤씨가 어떤 치료를 받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제게 전화를 걸어 윤씨가 당시 집중치료를 받았던 것으로 확인됐다며 방송을 재검토하는 게 좋을 것이라 말했습니다. 지금은 차장검사가 바뀌었지만 주치의는 물론 잘못된 형집행정지를 계속해 온 검찰에 대한 진상조사도 철저히 해야 할 것입니다.
보도가 나가기 전에도 후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격려해주신 선후배들, 두 달간 함께 고생한 스태프들, 기꺼이 협조해 준 대한의사협회, 저를 지혜양이 보내준 사람이라며 굳게 믿어주신 지혜양의 아버지와 가족들께 감사드립니다.
추적 60분 - 19대 국회 땅 보고서
추적 60분 - 19대 국회 땅 보고서
KBS 이병도 기자
언론의 제1사명은 권력에 대한 감시다. 뉴스를 단순히 전달하기보다,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통해 언론은 그 역할을 비로소 시작한다는 뜻이다. 수상 후기의 첫 머리를 이렇게 거창한(?) 말로 시작하는 것은 이처럼 자명한 명제에 대해 모두가 동의하지 않는 것이 오늘 대한민국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을 많이 보았다. 권력에 대한 감시를 하지 않는 기자는 기자가 아니냐고…. 분명 ‘아니다.’
‘19대 국회 땅 보고서’는 바로 이런 명제에서 시작됐다. 인사 청문회 대상인 고위 공직자에 대한 언론의 검증 보도를 비켜가는 입법부, 그래서 단 한 번도 제대로 검증받지 않은 국회의원들의 도덕성에는 과연 문제가 없을까? 재산 형성 과정에 문제는 없을까? 바로 이런 물음이었다.
KBS 탐사보도팀은 지난해 19대 국회가 개원하며 재산을 신규등록한 직후부터 취재에 돌입했다. 300명 전원의 재산을 엑셀파일로 정리했다. 그 중에서 부동산만을 취재 대상으로 정했다. 객관적으로 취재가 가능한데다 재산 형성 과정의 문제점을 가장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 부동산이기 때문이었다.
시간은 매우 오래 걸렸다. 300명의 재산을 정리하고 이들이 소유한 부동산 등기부등본을 떼는 데만 몇 달이 걸렸다. 연말 대선까지 겹쳐 결국 취재는 해를 넘겼다. 3월 말 국회의원들이 재산 변동내역을 신고했고, 추가 취재를 통해 보도를 할 수 있었다.
지리정보를 분석하는 GIS기법을 통해 국회의원들이 사들인 땅 대부분이 부동산 가격 급등지역에 위치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원 평창과 홍천, 세종시, 전남 무안과 전북 부안 등 개발 호재가 있었던 곳에 의원들의 땅이 있었다. 전체 분석 토지 715필지 가운데 6배 이상 시세차익을 거둔 땅이 82필지나 됐다. 상당수는 개발 정보를 미리 알고 땅을 샀고, 심지어 기초단체 의원 당시 자신의 땅이 있는 지역의 개발을 독려한 의원도 있었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언론의 제1사명은 권력에 대한 감시다. 언론에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난 5년을 돌이켜보면 언론은 스스로 반성할 점이 많다. 시청자들, 독자들에게 많은 빚을 졌다. 이달의 기자상을 받은 것도 더 열심히 노력해 이 빚을 갚으라는 격려로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이번 취재에서 힘들고 궂은 일을 도맡아 한 후배 공아영 기자에게 수고했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현장21 ‘가짜 베스트셀러’ 등 출판계 사재기 SB…
현장21 ‘가짜 베스트셀러’ 등 출판계 사재기
SBS 이대욱 기자
홍대 건너편에 위치한 연남동, 망원동, 동교동 일대는 수많은 출판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파주 출판단지에 대형 출판사들이 위치해 있다면 홍대는 주로 중소형 출판사들이 밀집해 있다.
홍대에 거주한 지 10년 가까이 되다 보니 언제부턴가 출판인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출판시장은 점점 작아지고 있지만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사명감과 지식과 상식을 전하는 최후의 보루에 서 있는 비장함…. 그런 그들과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도 술자리는 항상 알맞게 잘 익는다.
‘가짜 베스트셀러’ 아이템은 그런 술자리에서 생겨났다. 그들의 입에서 사재기가 튀어나왔고, 조소와 자책이 함께 새어 나왔다. 참 오래된 이야기였고, 누구나 다 짐작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정도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고, 결국 출판계 공멸이라는 절벽이 다가올 참이었다.
증거가 필요했고, 그 술자리에서 만들어진 믿음과 동질감을 바탕으로 4대 온라인 서점의 매출 목록을 얻을 수 있었다. 자료분석 끝에 나온 사재기 책들 가운데 뜻밖의 책이 나왔다. 황석영 작가의 여울물소리….
‘왜 황석영 작가의 책을 사재기 했을까’라는 의문도 가졌지만, 그만큼 사재기가 일반화 됐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사재기가 의심되는 대량 반복구매자들을 확인하기 위해 전국을 돌아 다녔다.
황석영 작가와 접촉한 건 방송을 나흘 앞두고였다. 첫 반응은 물론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확보한 증거자료와 취재 내용을 설명했지만 믿지 않았다. 황석영 작가는 출판사 측에 줄기차게 확인했고 출판사측은 줄기차게 부인하는 상황이 계속됐다. 결국 방송 전날 모든 자료를 들고 찾아가 취재 내용을 설명했다. “이 정도 취재 하셨으면…. 사재기가 진짜인가 보네요”라며 긴 한 숨을 내쉬었다.
방송이 나가고 두 달 가까이 지났지만 출판계나 정부에선 사재기 근절을 위한 대책을 아직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고질병을 고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좋은 책을 만들어 그 책의 가치만으로 인정받으려 하는 출판인들이 더 좌절하지 않도록, 그리고 독자들이 ‘진짜 베스트셀러’를 선택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방안이 서둘러 만들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한국행 희망 탈북 청소년 9명 라오스에서 추방 YT…
한국행 희망 탈북 청소년 9명 라오스에서 추방
YTN 김지선 기자
취재는 깊은 밤 절박함에서 걸려온 전화 한 통화에서 시작됐다. 탈북 청소년 9명이 중국을 거쳐 라오스까지 오는 데 성공했지만 라오스 정부에 의해 강제 추방됐다는 내용이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걸고 오른 탈주의 길 끝에서 이들을 맞이한 것은 대한민국 대사관이 아닌 북한 보위부 요원들이었다. 정부는 북한 측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라오스 당국이 탈북 청소년들을 한국이 아닌 북한에 넘겨줬다며 ‘매우 이례적인 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럴 수도 있다. 이례적으로 불심 검문에 걸렸고, 유례없이 북한 당국의 레이더에 포착됐고, 그 결과 라오스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데 성공한 수많은 탈북자 가운데 처음으로(우리 정부의 말에 따르면) 강제 추방돼 한국행을 눈앞에 두고 북으로 압송됐으니 말이다. 아니 애초에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하필 북한 땅에서 태어난 것 자체가 운이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이들의 운명만을 탓할 일은 아니다. 이름 없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들과 달리 이들은 선교사 부부를 만나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됐고 ‘감히’ 자유도 꿈꿀 수 있게 됐고, 걸리면 죽는다는 탈북도 거의 성공할 뻔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은 오히려 운이 좋았다. 그 좋은 운을 누군가에 의해 빼앗긴 것이다. 그리고 취재 결과 ‘그 누군가’는 잘못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채 현장 방문, 접견 한번 하지 않은 주라오스 대한민국 대사관, 이들이 강제 추방될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다가 북한에 물 먹고 부랴부랴 뒤늦게 이들의 행방 추적에 나선 우리 정부, 여기에 그동안 탈북자 문제에 너무도 무관심했던 대한민국이라는 사실이 속속 드러났다.
“북한의 주민들도 우리 대한민국이 누리는 그런 자유 또 행복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와야 된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인터뷰에서 밝힌 통일의 당위성이다. 고비용 저효율, 경제적 불균형, 이념적 차이, 난민 등 엄청난 부작용을 감수하면서 통일을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그들’에게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런 세상을 꿈꾸며 내민 9명의 손을 눈앞에서 놓쳐 버린 정부. 그저 지독하게 운이 없었을 뿐이라는 변명이 궁색하기만 하다.
국정원 정치공작 문건 한겨레신문
국정원 정치공작 문건
한겨레신문 정환봉 기자
2013년 상반기, 인터넷과 지면에 쓴 기사를 대충 꼽아봤다. 국정원 기사만 100건이 훌쩍 넘었다. ‘국정원 없이 올 상반기에 기자생활을 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른바 국정원 댓글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황당한 사실을 보고 놀라는 건 기사를 본 독자나 취재한 기자나 똑같다. ‘박원순 서울시장 제압’, ‘반값등록금 영향력 차단’ 문건을 취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확인 취재를 위해 만난 한 서울시 관계자는 “경찰 정보분석보고서도 보고, 검찰 정보분석 보고서도 봤지만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다. 아주 모범적인 보고서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바꿔 말하면 국정원은 우수한 정보 자원을 불법적인 정치개입과 공작에 낭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이같은 비상식적인 낭비가 원세훈 전 원장 시절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최근 국정원의 행동을 보면 이런 믿음이 흔들린다.
남재준 원장 체제의 국정원이 정치의 중심에 우뚝 섰다. 국정원이 얼마 전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하고 난 뒤부터다. 남 원장은 대화록을 공개한 뒤 참석한 국회 정보위원회에서 “국정원의 명예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 없어 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지난 6개월간 쉴틈없이 썼던 기사들이 정작 국정원에는 아무런 영향도 못미쳤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먹먹해졌다.
군대 시절 정보장교로 일한 경험이 있다. 이른바 ‘정보쟁이’로 지내면서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은 ‘정보’로 무언가를 바꾸려는 의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판단은 그 정보를 보고받은 지휘관의 몫이다. ‘정보쟁이’가 전쟁을 막겠다고 핵탄두가 들었는데 위성을 쏠 거라고 판단하거나, 전쟁을 하겠다고 위성이 탑재됐는데 북한이 핵탄두를 쏠 거라고 주장하면 나라가 망한다. 하지만 한 나라의 최고 ‘정보쟁이’인 남 원장은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정보를 사용했다. 여당을 돕기 위해서건 국정원을 구하기 위해서건 중요하지 않다. 정보를 이용해 국내 정치에 개입한 원 전 원장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아직 이정도 수준의 정보기관 밖에 가지지 못했다. 과분한 수상에 들뜨고 기쁘면서도 씁쓸한 뒷맛이 남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