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회)해외부동산 추적보고서 - 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
KBS 탐사보도팀 김시원
재벌들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대학졸업 뒤 회사 입사-미국 발령-자녀 출산-귀국 후 임원 발령. 지금까지 당연하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글로벌 경영’하려면 그렇게 해야 되는 것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력서의 뒷면이 궁금했습니다. 해외여행이나 외화반출이 쉽지 않던 시절, 어떻게 미국으로 가 집을 사고, 회사를 다니면서 석사 학위를 따고 아이를 낳은 걸까요. 용인된 특권을 이용해서 반칙을 한 건 아닐까요? 이번 취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입니다.
먼저 그들의 국적을 알아야 했습니다. 7월과 8월, 두 달에 걸쳐 창고를 개조한 5평 남짓의 탐사보도팀에서 동료들과 하루 종일 관보 자료를 엑셀로 옮겨 넣었습니다. 정부 관보(법무부 고시)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거나 상실한 이들의 이름과 본적, 생년월일이 올라옵니다. 2001년 이후의 전자관보는 PDF 파일로 다운 받을 수 있었지만, 1980년부터 2000년까지 20년 치의 데이터를 엑셀로 옮기는 일은 온전히 눈과 손의 몫이었습니다. 두 달 넘게 걸려 모은 데이터의 양은 약 52만 건. 탐사보도팀이 확보하고 있던 10대 재벌일가 1,051명의 명단과 대조해 보니 한국 국적을 포기하거나 상실한 재벌 일가 백여 명이 나왔습니다. 여담이지만 52만 건 가운데 상당수는 유럽과 미국 등으로 입양된 분들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몇 백 명 씩 똑같은 주소 – 예를 들어 홀트 아동복지회 –를 가진 이들이 비자발적으로 국적을 상실했습니다.
데이터 분석과 동시에 각 기업 홍보팀 관계자들과 만나 두 달 넘게 옥신각신했습니다.
A기업 “회장님이 미국시민권자인 것 같긴 한데 도저히 직접은 못 물어보겠어요.”
B기업 “회장님 부인이 외국 국적이어서 자제분이 외국인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 나라가 어디인가요?) 그건 알려드릴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C기업 “(아드님이 병역 회피하기 위해 국적 포기한 게 아니냐고 묻는 거죠) 아닙니다. 아드님은 미국에서 정치를 하실 거고, 회사도 물려받지 않을 겁니다.”
기업별로 답변서를 준 곳도 있고 끝까지 안 준 곳도 있습니다. 국적과 자녀의 학교, 병역, 세금 문제...지극히 내밀하고 접근하기 힘든 정보 때문에 고민하다 잠을 설친 날이 태반입니다. 그래도 시간이 흐르면서 정보가 차곡차곡 쌓였고 꼬리에 꼬리를 문 ‘왜’라는 의문이 조금씩 풀렸습니다. 결국 프로그램에서는 국적이나 영주권을 이용해 자녀를 외국인학교에 편법 입학시킨 사례와 총수 일가의 출산·교육에 회사가 개입한 사례들, 총수 일가가 나온 미국 학교에 회사 돈을 기부한 사례와 병역·납세의무를 회피하려 한 의혹 등을 제한적으로나마 담을 수 있었습니다. 방대한 양의 원래 자료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데이터를 뽑아내고 다시 취재 대상자들의 입장을 듣고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가는 과정, 역시 할 때마다 어려운 일입니다.
지난 2월 처음 현 부서에 온 저에게, 탐사보도란 영역은 늘 버겁고 힘듭니다. 똑 떨어지고, 가시적 성과가 있을 것 같은 주제만 선정해 온 이전과 달리 ‘이게 가능할까’하는 물음표에서 취재를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프로그램을 제 때 내보낼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참에 과분하게도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습니다. 서투른 접근이었지만 더 힘을 내라는 심사위원들의 응원으로 생각합니다. 방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하고 데이터를 분석해 준 리서처 동료들과 전임-현 탐사보도팀장인 이주형, 안양봉 선배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하지만 좀 더 노력해서 ‘당연해 보이는 것’들의 뒷면을 들춰보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회차 심사평
제290회 전체 총평
제290회 이달의 기자상 심사평
숫자와 수준 모두 탄탄했다. 심사에 공이 배나 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출품작 수 58개, 다른 달 보다 2-30% 많았다. ‘관심의 사각’을 두드리고, ‘보도 그 이후’를 되짚어 캐낸, ‘수준’들이 두드러졌다는 총평이 나왔다. 지역 보도 부문도 크게 주목받았다. 출품작수도 전체의 40%를 넘었고,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는 평을 받았다.
취재 보도 부문에서는 4편이 상을 받게 됐다. 국민일보의 ‘통영함 비리 의혹’은 방산 비리를 밝혀내는 단초가 됐다는 점에서 이견이 없었다. 취재 기자가 국방부와 무관한 정당 출입이라는 점도 주목받았다. 출입처중심주의를 탈피한 바람직한 취재 사례라는 호평이 뒤따랐다.
한국일보의 ‘애기봉 등탑 43년만에 철거’는, 자칫 묻혀질 뻔 했던 사실을 드러내, 감시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북심리전뿐 아니라 크리스마스 상징물로 43년간 친숙해진 등탑이, 국민들도 모르게 ‘실무적’으로 철거된 사실을 찾아내, 문제점을 지적한 점이 인정됐다.
JTBC의 ‘전두환 재산 환수 쇼? … 껍데기 부동산 내놨나’는 1년 전 있었던 큰 뉴스의 ‘그 후’를 추적 발굴한 보도로 호평을 받았다. ‘전두환 씨의 추징금 전액을 환수할 것’이라는 당시의 대대적 공언이 실제로 얼마나 이뤄졌는지를 검증해, 허실을 밝혀낸 점이 돋보였다.
서울경제 신문의 ‘정부 R&D 10건 중 6건, 셀프 과제로 나눠 먹기’는 정부의 R&D 지원 제도를 뿌리부터 개선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보도였다. 이른바, ‘사회 관계망’ 기법을 통해 방대한 자료를 정밀하게 분석해 신뢰도도 더했다. 그러나 지면 할애 등 보도의 비중이 내용에 걸맞지 않게 다뤄져 아쉽다는 지적이 나왔다.
기획 보도 신문·통신 부문에선 1편이 뽑혔다. 수상작인 한겨레신문 한겨레 21의 ‘눈물의 밥상 & 인권밥상 캠페인’에서는 우리 채소를 가꾸고 김치를 담그는 등, 어느 새 ‘우리 밥상’까지 맡기 시작한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과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고, 해법을 모색해 좋은 평가를 받았다. 기획 보도 방송 부문에서는 KBS의 ‘해외부동산 추적보고서 - 회장님의 나라는 어디입니까?’와 EBS의 ‘느린 학습자를 아십니까 - 경계선 지능 심층취재’ 2편이 뽑혔다. 해외부동산 추적 보고서의 경우, “KBS라서 가능한 대형 탐사 보도”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10대 재벌 일가 920여명을 대상으로 정부의 관보를 전수 분석, 출생과 국적 실태, 그들이 권리에 따른 의무를 지키고 있는지 등 핵심 사안들을 현장감 있게 고발한 점이 돋보였다.
‘느린 학습자’ 기사는 교육 방송 특유의 전문성이 반영된 우수작으로 평가 받았다. 지적 장애인 수준은 아니지만 정상적 학습이 어려운 ‘느린 학습자’라는 존재를 대중에게 알리고, 배려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특히 이들이 전국적으로 80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밝히고, 26편에 이르는 지속적인 보도로 사회, 정책적 관심을 이끌어 내는 전개가 좋았다는 의견도 나왔다.
지역 취재 보도 부문에서 뽑힌 2편은 모두 원전 안전 관련 보도물이다. 광주일보의 ‘한빛 원전 방사능 물질 유출 은폐, 실수’는 내부 사정을 잘 아는 다수의 취재원을 확보해 구체적이고 정확한 보도를 해냈다는 점이 호평을 받았다. 부산 MBC의 ‘고리원전 CCTV 은폐 의혹’ 역시, 원전 취수기 건물 침수라는 사고 과정에서 ‘보안’이라는 명목으로 차단된 정보 루트를 뚫고 진실을 추적했다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비슷한 주제의 보도물에 다 상을 주기로 한 건 이례적이지만 이의가 없었다. 최근 원전에서 지속적으로 사고가 나고 있어 어느 때 보다 원전 안전에 대한 감시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였다. 원전 안전은 지방언론이 사명감을 갖고 감시해 줘야 할 전문 분야라는 주문도 함께 나왔다.
전문보도 사진 부문에서는 경향신문의 ‘서해의 매향리 직도의 불기둥’이 수상작으로 뽑혔다. 매향리 사격장 폐쇄 이후 미 공군의 사격장이 된 직도의 상황을 처음으로 포착해 알렸다는 점이 평가를 받았다. 특히, 오랫동안의 준비와 관심이 배경이 된 단독 사진 영상이라는 점도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