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취재후기(187회)-논문, 고도성장의 그늘
187회 이달의 기자상(기획보도 부문) / 중앙일보 - “논문, 고도성장의 그늘”
중앙일보 탐사기획 부문 박수련 기자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고 한다. ‘결과로 평가해달라’는 프로들의 각오이자 약속이다. 그러나 학계의 현실은 프로답지 못했다. 지난해 황우석 교수팀 논문 조작 사건은 기본 원칙을 어긴 학자들이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믿었던 학자에 대한 애증이 한껏 부풀어오른 그 즈음, 취재팀은 한국 논문의 현주소를 짚어보기로 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세계적인 학술지에 한국 논문이 실렸다는 소식이 들려올 정도의 빠른 성장이 얼마나 내실을 갖췄는지 살펴보자는 것이었다. 자연스럽게 논문 표절과 공저자 끼워넣기, 대필 등 악습의 뿌리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취재 결과 한국의 논문은 ‘양적 성장, 그러나 질적 빈곤’으로 요약됐다. 한해 동안 세계 유명학술지에 실리는 한국 논문 수는 1989년 1300여 편(세계 34위)에서 2002년 1만5000편으로 늘어 세계 13위에 올랐다. 하지만 논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피인용지수를 기준으로 하면 한국 논문의 인기는 미미했다. 해가 갈수록 순위가 떨어져 2004년엔 세계 33위에 그쳤다.
고도성장이 남긴 그늘은 공저자 끼워넣기, 논문 표절 같은 악습이 여전히 공공연히 행해지고 있다는 데서 더욱 짙어졌다. 이번 취재에서 거둔 수확 중 하나는 공저자 끼워넣기 관행이 실질적인 수치로 확인됐다는 점이었다. 교수 7만 6500명이 2003년~2005년 동안 발표했다고 학술진흥재단에 신고한 연구논문을 분석해보니 한해 51편 이상 논문을 발표한 사람이 262명이나 됐다. 149편에 자기 이름을 올린 교수도 있었다. 논문을 심사하는 학회 편집위원들마저도 이런 관행을 인정하고 있었다.
취재원들의 얘기를 들을수록 충격은 더해갔다. 한 대학원생은 지도교수 이름을 넣은 학술지 논문을 2편 이상 내지 않으면 박사 논문 심사 통과가 안된다고 호소했다. 그런가하면 한 대학강사는 대학원 동기의 박사 논문을 수정해 지도교수와 함께 공저자로 이름을 올리고도 요약ㆍ발췌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며 군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또 1990년 이후 논문 표절 시비에 오른 교수 27명을 추적해보니 이중 6명만이 정직 이상의 중징계를 받았다. 이중에는 자신의 논문도 많이 표절당했지만 문제삼지 않는 것이라며 항변하는 교수, 자신은 아직도 표절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교수도 있었다. 학교나 동료 교수들은 쉬쉬하며 얘기를 꺼내기 꺼려했다. 지도교수 지시로 대필 경험이 있는 한 대학원생은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모든 게 끝장’이라며 인터뷰 내내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논문 악습’은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르는 척 하는 얘기였다. 학계에서 스스로 문제를 걸러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안타까웠다.
보도가 나간 후 사회 각계에서 전화와 메일이 들어왔다. 또다른 표절 경험, 해외 박사 학위 매매 등 논문과 관련해 할 말이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어왔다. 그중에서도 ‘참 부끄럽고 가슴 아픈 일이지만 지적해줘서 고맙다’는 노교수의 전화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 표절 안하기 운동을 함께 펼치자고 제안한 학자도 있었다. 짧지 않은 취재기간 동안 쌓인 피로를 가시게 하는 최고의 상이었다.
남의 들보를 들춰내는 일은 어렵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의미있는 들보 들추기를 해야한다면 앞으로도 언제든 나서겠다고 다짐한다. 덧붙여,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는 말만큼은 무색하지 않도록 살겠다는 다짐도 함께.
이 회차 수상작 2006년 3월
제187회(2006년 3월)에서 상을 받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