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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방독면 41만개, 정부가 은폐
취재후기
(188회-취재보도)-불량 방독면 41만개, 정부가 은폐 - KBS…
"불량 방독면 41만개, 정부가 은폐’ (KBS 탐사보도팀 임장원 기자)
국민방독면에 관한 자료 한 다발이 취재기자의 손에 넘어온 건 지난해 말. 자료를 준 정보원은 중앙일간지와 방송사 고발프로그램을 한 번 거쳤다 온 자료라고 했다. 국민방독면 수십만 개가 불량품이라는 것을 비롯해 여러 의혹들을 제기한 내용이었는데, 그 절반은 갖가지 기관에 탄원을 제기했다가 돌려받은 회신들로 채워져 있었다. 행정자치부, 국가비상기획위원회, 부패방지위원회, 소방방재청 감사실 등에 보내진 탄원서들은 한결같이 ‘이상없다’는 답변을 안고 돌아왔다. 2년 전 경찰이 수사를 했고, 그래서 불량품이 적발돼 17만개가 리콜됐다, 나머지는 이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는 내용이었다. 국회 국정감사에서도 두 차례나 의혹 제기가 됐지만, 별 탈 없이 넘어갔던 기록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불량품이, 그것도 수십만 개가 방치돼있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고민스러운 상황에서 취재의욕을 불어넣어준 건 엉뚱하게도 당시 뜨거웠던 줄기세포 논문 조작 파문이었다. 사이언스가 검증을 했다는 세계적인 논문도 상식을 뒤집는 놀랄만한 사실이 나오지 않았던가...
자료를 읽고 또 읽으면서 수많은 문서에 등장하는 수치들을 외울 정도가 될 무렵, 중요한 허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2002년 8월 이전에 생산된 방독면 60만개가 모두 불량인데 17만 개만 리콜이 이뤄졌다는 핵심 의혹에 대해 여러 기관들이 ‘이상없다’는 답변을 내놨지만, 어느 문서에도 해당 기간의 제품을 검사해봤다는 명확한 기록이 없었던 것. 한 번 해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억 예산이 투입된 국책사업이었지만, 국내엔 제대로 된 검사기관 한 곳이 없었다. 일본을 뒤졌다. 최대 방독면업체 S제작소가 검사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줬다. 그런데, 검사할 제품이 S물산 거라고 하자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검사를 피했다(나중에 알고보니 서로 제휴업체였다) 검사할 곳을 찾느라 한 달을 수소문한 끝에 3월 초 방독면 10개를 트렁크에 채워넣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괜히 출장비만 날리는 게 아닐까?’하는 걱정은 검사 시작과 함께 사라졌다. 검사 시작 1분 만에 일산화탄소 농도가 기준치의 세 배인 1000ppm을 넘어서버린 결과를 놓고 검사를 해준 방독면업체 공장장은 ‘이게 정말 시중에 유통된 제품이냐’며 반문했다. 일본인 앞에 한국의 치부를 드러낸 듯이 낯이 뜨거워졌다.
안도감과 씁쓸함을 함께 안고 돌아온 뒤, 본격적인 취재가 시작됐다. 그동안의 문서 검토와 일본에서의 검사 결과를 바탕으로 두 가지 ‘가설’을 세웠다. 첫째, ‘2002년 중반까지 생산된 국민방독면 수십만 개가 불량품이다.’ 둘째, ‘담당 공무원들이 계속된 문제제기를 고의로 묵살, 불량품을 은폐해왔다.’ 설마하면서 세워봤던 이 ‘가설’들은 취재가 진전될 수록 ‘사실’로 굳어져갔다.
4월 초 드디어 마지막 관문을 뚫기로 했다. 소방방재청을 찾아가 공동검사를 요청했다.
일본에서의 검사 결과를 그냥 방송해버리겠다며 머뭇거리는 공무원들을 협박(?)한 끝에 가까스로 공동검사가 이뤄졌고, 일본에서보다 더 심각한 불량품들이 확인됐다.
취재가 99% 진척된 상황, 남은 1%는 납품업체에 반론권을 주는 것이었다. 업체는 검사 참관 요청도, 인터뷰 요청도 거부하더니 결국 보도 직전에 KBS 취재가 엉터리라며 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냈다. 방영금지 가처분 신청은 기각됐고, 4월 11일 9시뉴스 <현장추적>을 통해 ‘국민방독면 상당수가 불량품’이라는 첫 보도를 내보낼 수 있었다. 그 후 한달에 걸친 방재청의 실태조사 끝에 ‘41만개 불량’이 공식 확인된 5월 초, 인내심을 갖고 묵혀뒀던 <4년간 은폐 의혹> 등 구조적 부실행정을 다룬 보도들이 잇따라 전파를 탔다.
4월 첫 보도 때는 외로웠다. 타사의 특종은 가급적 외면하는 우리 언론의 생리 탓인지 다른 매체의 후속보도도 없었다. 최종 결과가 나오고 은폐 의혹이 구체적으로 제기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이 규탄 성명을 내고, 다른 언론도 중요하게 다뤄줬다. 이런 사회적 반향은 조용히 정리하고 넘어가려던 소방방재청에 제동을 걸었고, 결국 상급기관인 행자부가 먼저 감사원에 감사를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방독면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취재진이 보도한 것은 불량품 문제였지만, 취재과정에서 국민방독면 사업 전체가 갖가지 문제점의 백화점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보도에 담아내지 못했지만 규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에 대해선 취재진이 확보한 자료를 감사원에 넘겼다.
기자가 탐사보도팀 소속이 아니었다면 이 아이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무런 데드라인도 없이 ‘꽝’ 날지도 모를 아이템에 매달리는 기자를 몇 달씩 지원해준 데스크는 든든한 우군이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묻혀있는 진실을 외롭게 파헤치고 있을 탐사기자들과 수상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이 회차 수상작 2006년 4월
제188회(2006년 4월)에서 상을 받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