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238회) “이유있는 질식사” / MBC
“이유있는 질식사”
MBC 보도제작3부 김경호 기자
“드럼세탁기에 들어갔던 어린이가 질식해서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최근 2년 사이에 세 번이나 뉴스를 통해 전해진 소식입니다. 드럼세탁기에 들어가면 위험하니, 아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잘 지도해야 한다는 친절한 설명도 뒤따랐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드럼세탁기의 본고장이라 할 수 있는 유럽이나 미국 등에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사고가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그것도 한 업체의 세탁기에서만 세 번이나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해당 제조 업체는 가정 교육을 원인으로 돌렸습니다. 가정에서 어린이들에게 철저하게 세탁기 안전 교육을 실시하는 외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어린이들에 대한 교육이 소홀해서 자꾸 사고가 일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어린이 안전에 앞장서겠다며 대대적인 캠페인까지 벌였습니다. 과연 원인은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사고 당시 판매된 해당 업체의 국내용과 수출용 드럼세탁기를 비교해봤습니다. 그 결과, 안전 구조에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음을 알아냈습니다. 미국 수출용 세탁기는 이미 오래 전부터 어린이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해 안에서도 열리는 문이 달려있었던 반면, 국내용 세탁기는 안에서는 절대 열 수 없는 문을 달아 판매한 것이었습니다.
왜 이 업체는 굳이 국내에선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 세탁기를 판매했던 것일까.. 문제의 부품을 납품한 이탈리아 제조업체들을 취재했습니다. 그 결과 당시 국내용과 수출용에 적용한 문의 잠금장치 가격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국내에서 판매된 세탁기의 잠금장치가 훨씬 싼 부품이었고, 국내에서 이 부품을 사용함으로써 해당 업체는 12억 원의 납품 단가를 절약한 것이었습니다
이 업체가 이처럼 국내와 미국의 소비자를 차별할 수 있었던 건 한국과 미국 정부의 서로 다른 안전 규정에 원인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드럼세탁기 안전 사고에 대한 규정이 전혀 없었던 반면, 미국 등에서는 이미 10여 년 전부터 어린이 안전 사고를 막기 위해 안전 규정을 마련해 시행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안전 규정에 따르면 드럼세탁기는 어린이가 들어갈 경우를 대비해, 반드시 안에서 문이 열리도록 하고, 구체적인 열리는 힘의 크기까지 정해놓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 이 규정에 맞춰 안에서도 열리는 세탁기를 판매해온 해당 업체가, 한국에선 규정이 없다는 핑계로 안에서 문이 열리지 않는 위험한 세탁기를 계속해서 판매해온 것이었습니다.
심지어 이 업체는 2년 전 국내에서 두 명의 어린이가 사망한 뒤에도 해당 세탁기의 리콜을 실시하지 않았고, 세 번째 아이가 희생된 올해에야 뒤늦게 리콜을 실시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80만 대가 넘는 해당 세탁기는 여전히 위험한 상태 그대로 국내 가정에서 이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국내 업체들이 국내와 외국의 소비자를 차별한다는 지적은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이처럼 어린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담보로 차별적인 영업 행태를 보인 경우는 알려지지 않고 있었습니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소비자의 안전을 무시하는 업체와 정부의 행태가 달라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차 수상작 2010년 6월
제238회(2010년 6월)에서 상을 받은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