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6편
교과부 간부들 모교에 ‘나랏돈 퍼주기’ 문화일보
<‘교과부 간부들 모교에 나랏돈 퍼주기’ 취재후기>
지난 4월 김도연 교과부 장관은 모교인 용산초를 방문했다. 5월에는 우형식 제1차관, 박종구 제2차관도 각각 모교인 대전고와 충암고를 방문했다. 교과부는 이에 대한 보도자료와 사진을 친절하게 배포했다.
"장관이 스승의 날이 있는 5월을 맞아 차관 뿐만아니라 전 국장들에게 학교현장을 다녀오라고 지시했습니다. 학교현장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취지이며, 특히 학교현장을 잘 모르는 과학기술부 출신 국장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교과부 관계자는 자세한 설명도 덧붙였다.
이같은 설명뒤에 기자에게는 하나의 의문이 뒤따랐다. 지난해 모 간부가 개인적인 자리에서 털어놓은 불만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불만은 바로 빈손으로 모교를 방문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교육부 국장인데 모교 가면서 빈손으로 가니까 영 모양이 나지 않아. 그래도 선배로서 학생들에게 책을 사주든지, 학교에 선물을 안겨주든지 해야 되는데..."
사정이 작년과 마찬가지라면, 장관지시에 따라 의무적인 모교방문에 대해 간부들은 영 탐탁치 않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하지만 취재결과는 달랐다. 간부들에게 `500만원 지원증서'라는 `묵직한 선물'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참 어이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빈손' 모교방문의 고충을 전혀 이해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적인 감정이다. 그런 사적인 감정을 해결하기 위해서 엄연히 국민의 세금인 나랏예산을 사용한다는 것은 충격이였다.
5월 22일 첫 보도이후 반응은 예상이상이였다. 모든 언론사가 교과부 간부들의 처신을 질타했고, 시민교육단체는 물론 청와대까지 문제점을 심각하게 인식했다. 게다가 보도후 교과부의 적절치 못한 대응과 모교가 아닌 자녀학교를 방문한 간부들이 추가로 드러나면서 사태는 일파만파로 번졌다.
무엇보다 의미가 있었던 것은 바로 특별교부금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켜 나갔다는 점이다. 1조원이 넘는 예상이 불투명하게 사용되고, 이를 관행으로 치부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다. 감사원은 교과부의 특별교부금에 대해 감사에 착수했다. 교과부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특별교부금의 개선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이제 언론은 국민과의 약속이 지켜지는지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한미쇠고기 협상 관련 보도 경향신문
경향신문
참으로 힘겹게 지나온 한달이었다. 한미 쇠고기협상이 전국민적인 촛불로 타오르던 지난5월 내내 광우병속에 파묻혀 지낸것 같다. 정부의 각종보도자료, 미 연방관보의 동물사료금지조치와 미 식품안전검사국(FSIS)의 수출입규정, 전미 목축협회(NCBA)의 쇠고기수출로비, 미국에서쇠고기를 수입하는 세계 117개국가의 개별 수입조건등등. 천성이 깔끔함과 거리가 먼 성격탓에 내 책상에는 그날그날 기사를 쓰는데 참조하고 아무렇게나 쌓아둔 자료들이 뒤죽박죽 엉켜 이제는 필요한 자료를 찾아보는것도 큰일이 되었다. 짧은영어실력으로 횡돌기,극돌기등 우리말로 해도 무슨말인지 알아먹기 힘든 전문용어와 씨름하는 것도 곤욕이었다.
하지만 숱한 우여곡절끝에 5월 한달간만 오관철기자와 함께 1면톱,사이드등 20건의 단독기사를 발굴했다. '광우병여러건 발생해도 수입못한다'(5월5일자), '미국소 한해 40만마리 광우병 유사증세보여'(5월7일자) '사료금지조치 미관보-정부 설명다르다'(5월10일자)등 처음 며칠동안은 기사가 나올때마다 농식품부에서 '반박자료'를 쏟아내며 거칠게 태클이 들어왔다. 하지만 어느순간부터는 농식품부에서도 '막무가내'로 판단한듯 했다. 대신 평소 안면이 있는 농식품부 공무원들은 "강기자노력은 갸륵하지만 그런다고 뭐가달라지겠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상대가 미국이고 이미 양국대표가 서명까지 마친 협상내용이 달라지겠냐는 것이다. 사실처음에는 나의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때마다 나를 채찍질한게 있었다. 아이들 때문에 촛불시위에 나가지 못하지만 연일 관심깊게 경향신문 보도를 보고 있다는 강원도 원주에 사는 한 30대 어머니의 간곡한 전화통화 였다. 이후 '세이퍼 미 농무장관의 육성녹음입수'(5월20일자), '한나라당 홍문표의원의 인수위시절 증언'(5월21일자), '농림부 인수위 보고서 단독입수'(5월22일자)등 한미FTA를 둘러싼 '졸속협상'의 뿌리도 추적해냈다. 하지만 결국 원주에 사는 그 어머니와 약속을 지키지는 못했다. 정부는 6월24일 수입재개를 위해 고시 관보게재를 강행키로 결정했다. 공교롭게 바로그날 필자는 기자협회로부터 '이달의 기자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광우병위험으로부터 아이들을 지켜내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채 말이다. 기자상을 받는 필자는 그래서 한없이 무겁고 죄송하다.
태안 피해 보상 제대로 받자 서울신문
서울신문 정은주 기자
지난달 23일 영국 런던에서 열린 국제유류오염보상기금(IOPC Fund)비공식 회의장.국제기금 사무국과 회의하던 우리 정부 대표단은 서울신문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IOPC기금이 보상한 해외 기름유출 사고가 한국 언론에 자세히 소개됐습니다.피해 어민들은 국제적 기준을 이해하고,그 이상을 보상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태안 기획기사가 IOPC기금과의 협상에서 도움이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뜨거워졌다.취재원과의 약속을 조금이나마 지켜냈다는 기쁨에.
지난 1월 태안 주민 3명이 잇따라 목숨을 끊었다는 신문 기사를 읽으며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는가’라는 물음을 던졌다.자원봉사자의 물결이 태안을 뒤덮었지만,정작 주민들은 앞이 보이지 않는 피해 보상 과정에 절망하고 있었다.
실제로 한국은 IOPC기금에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많은 부담금을 내고 있지만,피해 보상금은 ‘쥐꼬리’ 수준이다.유럽은 피해 청구 금액의 60∼80%를 받지만,우리나라는 15% 안팎만 보상받고 있다.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보상금을 많이 받아내는 그들의 노하우가 무엇인지 궁금했다.한국언론재단의 후원 덕분에 해외 취재의 길에 어렵지 않게 올랐다.
일본 후쿠이현 미쿠니 마을,프랑스 파리와 브레스트,스페인 산티아고와 라 코루냐 등 세계 대형 기름 유출 사고 현장을 2명이 8박9일 동안 누볐다.정부 관계자와 피해 주민,환경단체,변호사,기자 등을 만나 피해 보상 과정을 취재했고 그들의 성공 전략을 4회 시리즈에 담았다.
이명박 특검과 삼성 특검이 ‘쌍끌이’로 진행되는 사회부 법조팀에서 해외 취재를 기획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그 무모하고 이기적인 도전을 법조데스크와 선후배,동기들이 가능하게 했다.IOPC기금의 피해보상 절차와 국내외 법원 판례 등을 꼼꼼히 설명해준 김성수 변호사도 빼놓을 수 없는 후원자다.마지막으로,한국에서 날아온 낯선 기자들에게 기꺼이 시간과 정보를 내준 해외취재원 50여명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태안 주민들이 제대로 피해 보상을 받도록 언론이 힘을 보태라고 그들은 당부했다.그 약속을 지킬 때까지 발걸음을 멈추지 않겠다.
잡석이 석탄으로 둔갑 삼척MBC
잡석이 벨트컨베어를 타고 들어가 석탄으로 둔갑하는 현장 화면을 보는 순간 내 눈을 의심했다.
"잡석을 섞어 국고보조금을 횡령한다."는 그동안 떠돌던 말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공기업인 석탄공사가 별도의 운반라인까지 만들어 석탄에 돌가루를 섞어왔던 것이다.
하루 평균 100톤씩, 2003년 이후 석탄이 아닌 돌가루에 수십억원의 국고보조금이 나갔다.
'국고보조금은 보는 사람이 주인'이라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
1,700명이 넘는 종업원이 일하는 회사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장기간 계속될 수 있었을까?
작업이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지하 수백미터 채탄 막장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더우기 국고보조금을 더 타내도 나랏돈이 새는 것 말고는 누구하나 손해 보는 사람이 없다.
이처럼 구조적인 비리에는 공기업인 석탄공사 노조가 깊숙하게 개입돼 있었다.
노조는 하청업체 선정에도 전권을 휘둘렀다.
보도가 나간 뒤 감사원이 현장 감사를 통해 사실을 확인했다.
더 이상의 국고 유출을 막게 됐고 과분한 상까지 받게 되었지만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태백시의 인구는 석탄산업이 호황을 누렸던 80년대에 12만을 헤아렸으나 이제는 5만 여명에 불과하다.
문제를 일으킨 석공 장성광업소도 4천 여명 이었던 종업원이 1,600명으로 줄었다.
더구나 채탄조건이 나빠지면서 폐광이 멀지 읺았다는 말이 자주 나오고 있다.
석공장성광업소가 문을 닫으면 태백시의 지역경제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이번 취재를 하면서 개인적인 고민은 이 기사로 인해 폐광이 앞당겨 지지나 않을까? 지역이 더 어려워 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소금은 짜고 고추가루는 매워야 하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하지만 지역 주재기자는 지역의 아픔도 외면할 수 없다.
턱없이 오른 기름값 때문에 모두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내 유일의 부존 에너지 자원인 석탄산업이 새 전기를 맞았으면 좋겠다.
대규모 못자리 피해 단독보도와 피해원인 추적 대구…
대구일보 우성덕 기자
수습 딱지를 뗀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너무 큰 상을 받았다. 기쁜 마음과 기자로서의 보람은 나 혼자 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팀 전체가 받는 상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이 상도 사회팀장과 팀원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단순한 ‘정보보고’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규모 못자리 피해 관련 보도는 농사철로 한창 바쁜 한 농민의 전화 한통에서 시작됐다. ‘모가 다 말라 죽어 모내기를 못한다’는 하소연이었다. 특히, 일대 농가들이 모두 모가 썩고 말라죽어 '한 해 농사를 망치게 생겼다'고 했다.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고, ‘팩트’를 찾아야 했다. 피해 농민들의 도움으로 이곳저곳을 돌며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그 피해는 광범위하고, 동일했다. 이것만으로도 기사는 됐다. 하지만 갈수록 커지는 ‘왜’ 라는 궁금증은 취재에 속도를 붙게 만들었다.
이렇게 대규모 못자리 피해 관련 첫 보도는 5월 중순 처음 기사화 됐고, 피해 원인에 관한 진실은 여전히 미궁 속으로 남겨졌다.
하지만, 그 진실을 찾고, 밝혀내는 것 또한 나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이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발품을 팔아 많은 피해농민들과 접촉을 해야 했고, 진실을 외면하려는 사람들과의 언쟁도 있어야 했다. 결국, 계속된 보도 속에 처음부터 발뺌하던 상토 공급업체도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게 했고, 농민들에게 보상을 하겠다고 전해왔다. 그리고 지금 애간장을 태우던 피해 농민들은 지금 각자의 피해 면적에 맞춰 보상금을 지급받고 있다.
피해 보상 협의가 끝나고 많은 농민들에게서 격려의 전화가 걸려왔다. 물론 ‘고맙다’는 인사였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자신들의 억울함을 들어주고, 가만히 앉아서 당할 뻔한 피해를 보상받기 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올 한 해 농사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됐다는 소박한 인사도 잊지 않았다.
한 가지 사안을 가지고 7차례 걸친 보도를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편집국과 데스크의 전폭적인 지지가 없으면 불가능했다. 다시 한 번 사회부 동료를 비롯해 대구일보 모든 식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다민족 다문화 시리즈 매일신문
<취재후기>
“세상은 변했는데, 사람(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1. 경북의 한 농촌. 20대 후반의 베트남에서 온 신부가 국수를 말아 머리에 이고는 총총걸음으로 들녘으로 향한다. 그녀의 등에는 젖먹이가 업혀있다.
#2. 대구의 한 염색공장. 시커먼 피부의 스리랑카 노동자가 마스크도 끼지 않은 채 염료에 천을 밀어 넣고 있다. 공장에는 중국에서 온 동료까지 5명의 외국인이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3. 대구의 한복판인 동성로. 무리를 지은 외국인이 노점 리어카의 옷을 살핀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건네며 한 벌씩 옷을 고른 뒤 셈을 치른다.
2008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농촌에는 한국으로 시집온 결혼이주여성들로, 도시에는 ‘코리안 드림’을 이루려는 외국인 노동자들로 넘쳐나고 있다. 그리고 어느덧 그들의 자녀들이 우리의 아이들과 함께 뛰놀며 공부하고 있다.
평화롭고 여유로운 풍경 그 속에 한 발짝만 발을 내밀면, 잔혹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못사는 나라에서 시집왔다는 것으로 우리는 때리고 욕을 하며, 멸시의 눈길을 보낸다. 마치 노예를 부리듯 그들이 도망이라도 갈까봐 감시하고, 주위에 울타리를 쳐버린다.
2008년 일어나고 있는 또 하나의 대한민국 자화상이다.
취재팀은 우리와 함께 살면서도 교집합을 이룰 수 없는 외국인근로자, 결혼이주여성, 중국·고려인동포, 새터민, 화교 등과 더 나아가 그들의 2세의 삶을 되짚어보기로 했다. ‘다민족, 다문화’ 시리즈는 우리의 의식 속에 깊이 박혀있는 ‘단일민족’의 자부심(?)을 깨보자는 의기로 시작됐다.
우선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으로 들어가야 했다. 경북 문경에서 만난20세의 베트남 신부는 만삭의 몸을 하고선 취재진에게 “베트남 음식이 너무 먹고 싶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상담소에서 만난 30대의 베트남 여성은 서툰 한국어로 연신 “도와주세요”라고 울먹였다.
취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우리의 편견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다문화정책 역시 우리의 시각과 입장으로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낙담만 할 수는 없었다. 현실만 보여주고, 또 그렇게 잊어버리는 일이 반복되어서는 안될 일이었다. 그만큼 ‘다문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 개선과 대안이 절실해보였다.
취재진은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일찍이 다민족, 다문화 정책을 진행해온 유럽과 호주, 대만, 일본 등으로 날아가 그들이 펼치고 있는 정책의 장·단점을 찾으려 노력했다.
자치단체와 머리를 맞대기도 했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찾는 시민사회단체의 모범 사례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한걸음씩 다가가는 법을 알리려 했다.
그러나 자신의 신분이 드러날까봐, 자식들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봐하는 걱정들로 취재가 쉽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은 만나기를 꺼리고 눈치를 봤다. 더 많은 사연을 소개하지 못한 아쉬움 뒤로 그들이 당당한 시민이 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기사가 나간 후 한 할머니는 전화를 걸어 “며느리가 도망칠까봐 시민단체에서 운영하는 한국어 교실에 보내지 않았는데 생각이 잘못됐다”며 앞으로는 진짜 며느리처럼 대하겠다는 말을 취재진에게 들려줬다.
‘다민족 다문화’ 사회는 진행형이다. 이 할머니처럼 조금씩이라도 마음을 연다면 적어도 피부 빛이나 자라온 문화가 다르다는 것이 ‘나’와 ‘너’를 구별하는 잣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