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6편
동해안 경제자유구역 MOU 실적 조작 KBS춘천
동해안 경제자유구역 MOU 실적 조작
KBS춘천 박상용 기자
변변한 산업시설이 제대로 없는 강원도의 산업 경제 지표는 언제나 전국 최하위권이다. 강원도는 이런 현실을 늘 바꾸고 싶어 했고 ‘경제자유구역 유치’라는 돌파구를 찾아냈다. 많은 외국기업을 강원도로 유치해 동해안의 산업 지도를 획기적으로 바꾸겠다며 도민들에게 홍보해왔다. 이 다짐은 투자 의향 ‘128개 기업 MOU 체결’이라는 수치로 구체화됐다.
“진짜 올까?” 취재는 상식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강원도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실적 자료를 공개하지 않았다. 의문은 의심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번 아이템은 자신과의 인내심 싸움이었다.
시간을 쪼개가며 했던 취재라 진도는 쉽게 나가지 못했다. 지역에서 전 세계에 퍼진 기업들의 상세 정보를 확인하고 MOU 체결 여부까지 확인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작지만 의미 있는 팩트를 모아가며 난관을 극복해 나갔다.
일본 기업들이 취재 요청을 계속 거부했을 때는 취재를 포기하고 싶었다. 막상 그 고비를 넘겨보니 보도자료 뒤에 감춰졌던 충격적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강원도라는 행정기관이 부풀리기를 넘어 실적을 조작했던 것이다. 많게는 3백억 원 이상 투자하겠다고 했던 업체들은 실제 투자 능력이 떨어지거나 의지가 전혀 없었고, 심지어 강원도를 투자 대상지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기업 유치 실적의 상당수는 강원도 마음대로 그려낸 허상이었다. 이렇게 모래성에 쌓은 실적을 토대로 강원도는 경제자유구역을 유치했고 각종 경제유발효과가 14조원으로 예측된다며 장밋빛 홍보에만 열을 올렸다.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미국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아무리 법적 책임 없는 MOU라지만 이는 강원도 행정의 ‘신뢰’ 문제였다. 양해각서 MOU제도는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치적을 부풀리며 여론을 손쉽게 왜곡하는 홍보 수단이자 정부 정책까지도 오판하게 만들 수 있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행정기관 입장에선 MOU 실적으로 크게 홍보하다가 논란이 생기면 법적인 책임이 없다고 빠져나갈 수 있는 ‘꽃놀이패’였던 것이다.
상당수 정부 정책의 평가 지표 중 하나가 ‘MOU 실적’인 만큼 이 부분에 대한 제도 개선이 시급해 보였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강원도청 내부에서도 반성의 목소리가 나올 만큼 MOU 홍보 관행에 경종을 울렸다.
감사원 감사 결과를 포함해 앞으로 제도 개선 논의를 지켜보겠다. 이제 전담 기구가 출범한 경제자유구역이 제대로 추진되는지도 꼼꼼히 점검하겠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신뢰를 보내주셨던 곽재훈 보도국장과 보도국 선후배께 수상의 영광을 돌린다. 차세대 무역업계 기둥 이 과장과 취재 과정에 큰 힘이 돼주셨던 조화행 선생님께 감사의 뜻을 전한다. 제 아내 수미, 그리고 7개월 전 찾아온 큰 선물, 선우와도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죄의식 없는 표절 대한민국 조선일보
죄의식 없는 표절 대한민국
조선일보 양승식 기자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가 100% 번역 수준으로 표절했다.” 믿을 수 없는 정보였다. 공개 취재에 착수했다. 서울대 관계자들은 입을 모아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했다. 제보 자체의 신빙성이 의심되기 시작했다. 한 달에 걸친 취재가 수포로 돌아갈 즈음이었다. 한 취재원의 입에서 “정치외교학부의 한 교수가 최근 사직했다”는 말이 나왔다. 하마터면 영영 묻힐 뻔했던, 서울대 교수 논문 표절이라는 사상 초유의 사건은 그렇게 드러났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기분이었다. 한번 시작된 논문 표절 사건은 서울대를 중심으로 교수 사회를 뒤흔들었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연구논문으로부터 시작된 표절 의혹이 학위 논문으로까지 옮겨갔다. “표절자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한 취재원의 말이 계기였다. 그렇게 시작해 표절이 의심되는 수십 편의 석·박사 학위 논문을 검증하다 나온 결실이 ‘스타 강사’ 김미경씨의 논문 표절이다. 한참 주가를 높이던 김씨를 두고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우리 시대에 힐링 메시지를 던져주는 강사’와 ‘논문 표절자’ 두 가지 사실 중 어떤 것이 우리 사회 발전에 더 큰 영향을 주느냐는 고민이었다. 일주일 후 결론은 ‘표절’을 바탕으로 한 힐링은 ‘거짓’이라는 것이었다.
김씨의 표절 보도 이후 취재진은 한 달여 동안 수백 편의 논문과 씨름해야 했다. 매일같이 밤을 새워가며, 깨알 같은 크기로 인쇄된 논문을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은 고역이었다. 하지만 학계를 비롯한 각계각층의 성원이 있었고, 기획을 허망하게 멈추기엔 이미 사람들의 관심과 성원이 너무 커졌다.
참고문헌 자료들을 교묘히 어휘만 바꿔 베낀 논문들이 절대다수였다. 그러나 100% ‘복사’ 수준으로 표절한 논문이 아니면 보도할 수 없다는 것이 취재진이 세운 ‘철칙’이었다. 빗발치는 제보들의 옥석을 가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사사로운 원한에 근거한 제보가 몰려왔다. 자신의 적(敵)들에게 어떻게든 타격을 입히려는 취재원들의 눈빛을 보며 우리는 판단해야 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욕망인지. 둘 사이의 경계는 모호했다. 밤새 토론했고, 팩트가 함유된 정보 몇 조각만을 보도하기로 했다.
“사회에 희망을 주던 김미경씨를 왜 몰락시켰는가” “십수년전 논문을 걸고넘어지는 것은 마녀사냥이자 인민재판이다” 취재과정에서 들은 볼멘소리들이다. 많은 기성세대의 생각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수긍이 갔다. 그렇다고 교수·목사·스타 강사까지 표절로 출세하는 우리나라가 정상은 아니었다.
공정한 경쟁이 아닌 반칙을 일삼는 자들이 명성과 부를 차지하고, 원칙을 지킨 사람들이 패배자가 되는 게 제대로 된 것인가? 기사 몇 편으로 사회가 바뀐다고는 믿지 않는다. 이제 막 작은 씨앗을 뿌렸을 뿐이다. 함께 고생한 이옥진, 원선우 기자와 데스크, 끊임없이 성원한 독자들에게 감사한다.
편의점 불공정 계약 경향신문
편의점 불공정 계약
경향신문 박순봉 기자
지난해 말부터 편의점 운영이 힘들다는 얘기를 들었다. 어느 대학 홍보실 직원, 편의점을 운영하는 부모님을 둔 학교 후배 등으로부터였다. “편의점 운영이 그렇게 힘든가?” 배부른 소리는 아닐까 생각했다. ‘여유자금이 있는 사람들이 운영하는 업종’, ‘ 깔끔하고 운영이 쉽다’, ‘큰돈은 벌지 못하지만 안정적이다’…평소 편의점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이다.
“편의점이 힘들다면 너무 많은 편의점이 문제인걸까?” 처음엔 과도한 경쟁 정도의 문제를 생각했다.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춰 취재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한 젊은 점주가 거제도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다가 편의점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제보를 들었다. 편의점에서 사람이 죽다니. 상식과는 크게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단순히 과다경쟁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을까. 편의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고 다른 방향의 취재가 이어졌다.
50명 이상의 편의점주와 만나거나 전화 통화했다. 취재를 할수록 본사와의 불공정한 계약 관계가 드러났다. 시작은 편의점 본사 간 과다경쟁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본사가 점주들을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졌다. ‘근접 출점’ ‘정보공개서 미제공’ ‘예상매출 허위과장 광고’ ‘과다한 계약해지 위약금’ ‘24시간 강제영업’ ‘과다한 미송금 위약금’ 등 다양한 문제점이 보였다. 만나본 점주들은 “제발 그만두고 싶다. 하지만 계약해지도 위약금 때문에 쉽지 않다”고 했다.
편의점 가맹점주와 본사와의 불공정한 관계를 개선하는데 기사가 힘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제도의 청년 편의점주 자살 건은 내러티브 방식으로 기사를 썼다. 사람들을 울리고, 감정의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였는지 반응이 나타났다.
이후 편의점의 불공정 계약을 고발하는 기사를 9편정도 썼다. 가장 최근에 썼던 부산 광안대교에서 3번째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편의점주의 자살은 부산지역의 한 편의점주가 취재에 큰 도움을 줬다. 단순 생활고로 묻힐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점주들이 있기에 사회가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상을 받게 되니 부끄럽고 죄송한 생각도 든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맹거래법 개정이 진행 중이지만, 실제 점주들이 만족할만한 수준인지는 모르겠다.
아직도 많은 불공정사례 제보가 들어온다. 고통을 호소하는 점주의 e메일을 아직도 받는다. 앞서 다룬 사례를 벗어나지 않기에 더 다루기 어려운 언론의 한계도 느낀다. 하지만 전국편의점주협회가 출범하고, 높아진 편의점 불공정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볼 때 희망을 갖는다. 힘든 상황에서도 어려움을 세상에 알리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점주들께 감사한다.
ISS 보고서 단독보도 서울경제신문
ISS 보고서 단독보도
서울경제신문 우승호 기자
‘IMF:BIS=MSCI:ISS’
1997년 11월 21일 밤10시. 임창열 부총리가 긴급 기자회견을 열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2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기업과 금융 부실로 IMF에게 손을 벌렸다.
IMF는 지원조건으로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국제결제은행(BIS) 자기자본비율이라는 칼날에 100년 된 은행도 문을 닫았다. 정부는 168조원의 공적자금을 쏟아 부었다. IMF는 사외이사 제도도 요구했다. “이사회가 대주주와 경영진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해 기업이 부실해졌다”는 이유다. 기업들은 사외이사 중심의 이사회 제도를 도입했다.
IMF 졸업 후 10년이 지난 2009년. 우리나라는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선진지수 진입을 시도했다. 선진지수 편입은 글로벌 펀드의 주요 투자대상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지난해까지 4번을 시도했지만 MSCI의 높은 문턱을 넘지 못했다.
MSCI의 자회사 중 하나가 ISS(International Shareholder Services)다. MSCI의 고객인 글로벌 펀드들이 투자한 기업의 주총안건에 대해 자문을 해 주는 곳이다. MSCI가 엄격한 기준에 따라 지수편입을 결정하는 것처럼 ISS도 엄정한 내부기준에 따라 의견을 낸다. IMF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 쫄딱 망했던 은행들은 세금으로 살아났고 주인자리는 사외이사들이 꿰찼다.
그런 금융권이 지난해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시끄러웠다. 선거일 하루 전인 12월 18일 KB금융 사외이사들은 ING생명 인수를 반대했다. 찬성과 반대의 이유는 분명했다. 그러나 시장은 패닉에 빠졌다. “(경영진이) 계약서에 찍은 도장이 마르기도 전에 (사외이사들이)결정을 번복했다”는 것이다. 정권 교체기에 주인 없는 은행의 주인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갈등이 폭발했다. 지난 2월 23일 KB금융은 신임 사외이사를 내정하면서 정통 관료의 탄탄한 그물망을 쳤다.
사실 금융지주의 사외이사와 지배구조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슈가 아니다. 등장인물만 바뀔 뿐 시나리오는 뻔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손 놓고 무반응으로 일관하던 외국인 주주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KB금융의 주요주주인 ING와 ISS가 대응모드로 돌아선 것이다. 포인트를 찾아 돌고 돈 후 길목에다 바리게이트를 쳐 놓고 기다린 끝에 ‘ISS, KB금융 사외이사 선임 반대’라는 보고서를 입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KB금융과 감독당국은 한 개인의 일탈과 ISS의 몰이해로 인한 해프닝으로 몰고 갔다. 마치 외환위기 직전까지 “외환보유고는 문제 없고 늘어난다. 외환위기는 몰라서 하는 말”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무한 반복되면서 나락으로 빠지고 있는 은행들의 지배구조와 사외이사 문제에 대해 외국인 투자자들이 울린 경종이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수상소감을 마무리하며 “이번 기사도 서울경제신문이었기에 가능했다”는 말을 남기고 싶다.
사회 지도층 성접대 의혹 TV조선
사회 지도층 성접대 의혹
TV조선 안형영 기자
만약 사회지도층의 성접대 의혹이 역사에 기록된다면 어떤 무늬로 새겨질까? 문득 드는 생각에 아직까지는 답을 못하겠다. 경찰 수사는 이제 전환점을 돌았을 뿐이고 아직 결론도 안갯속이다.
처음 성접대 의혹 정보를 접했을 땐 취재팀 또한 단순한 치정극 내지는 모함이려니 생각했다. 이보다 더 소설 같은 얘기가 있을까? 하지만 취재팀에게 잡힌 진실의 한 끄트머리를 잡고 실마리를 잡아갈수록 놀라움과 충격 그 자체였다.
병원장, 사정기관 고위층, 감사원 전 국장 등 쟁쟁한 인물들이 건설업자의 성접대를 스스럼없이 받았고, 성접대에 동원된 여성들이 업소 종업원이 아닌 가정주부와 여성사업가, 예술가라는 팩트 앞에선 할 말을 잃었다. 떨리는 가슴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부여잡고 데스크에 보고한 뒤, 긴 회의의 연속. 많은 고민과 전략 속에 ‘성접대 의혹’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러나 특종의 단맛도 잠시뿐. 냉담한 타 언론과 보이지 않는 으름장들. 그 참담함 속에 사흘 꼬박 외로운 보도를 내보냈다. 경찰이 신호탄을 올리고 모든 언론이 대서특필했지만 취재 내내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누구는 선정적이라고, 누구는 애먼 사람 잡는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소송이 두렵지 않느냐고도 반문했다.
잘못된 검증으로 비판을 받아야 할 청와대는 비판을 달게 받기보단 경찰이 괘씸하다며 보복성 인사를 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어떤 언론은 청와대의 인사검증시스템 부재나 권력층의 부도덕성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문제의 동영상은 애초에 없었다’,‘여성들이 진술을 바꿨다’는 보도로 일관했다.
기자는 기사로 모든 것을 말한다. 언론계에서 불문율처럼 여겨지는 이 단어를 깡그리 무시한 채, 선배와 후배들에게 하소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스스로 성접대에 동원된 걸 인정하면서 처벌을 원하는 여성들이 있다. 여성들을 돕겠다고 나선 어떤 이는 오히려 여성을 이용했다.” 여러 번 확인한 팩트였기에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고, 돌아오는 답변은 “여자들도 웃긴다”였다.
여전히 성접대 의혹이 실체가 없다는 이들은 ‘당사자를 형사처벌하는 게 힘들 것’이라는 전문가 견해를 설파한다. 그러나 언론마저도 법률가적 시각으로 사건을 재단해야 하는가? 사건의 당사자는 여전히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진실은 당사자가 가장 잘 아는 영역이다.
이런 모든 마음고생과 괴로움 속에서도 언론의 본분을 높이 평가해 준 많은 언론인들이 있다. 한 후배는 “기자가 취재하는 게 진실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그냥 진실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라며 건투를 빌었고, 한 선배는 “소걸음처럼 천천히 가다보면 진실은 밝혀질 것”이라고 조언했다. 본부장과 부장은 힘들 때마다 ‘투철한 문제의식과 역사의 기록자로서의 사명감’을 강조하면서 활기를 불어넣어줬다. 취재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 미완이다. 끝장을 보고 싶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 말씀 한겨레신문
원세훈 전 국정원장 지시 말씀
한겨레신문 정환봉 기자
지난해 12월 11일, 국정원 직원의 대선 여론 조작 의혹이 불거진 뒤 5개월 가까이 흘렀다. 5개월에 가까운 취재기간 동안 항상 앞에는 ‘국정원’이라는 두꺼운 벽이 서 있었다. 취재를 처음 시작할 때만해도 그 벽 뒤에 무엇이 있을지 몰랐다. 마냥 두드릴 뿐이었다. 두드리다보니 벽도 조금씩 허물어졌다.
처음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원장님 지시·강조 말씀’을 봤을 때에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앞섰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여당과 정부 정책을 꼼꼼하게 챙긴 것에 한 번 놀라고, 전교조·민주노총은 물론 국민의 선택에 따라 국회에 진출한 야당 국회의원마저 종북으로 몰아세우는 것에 두 번 놀랐다. 무엇보다 이같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지시말씀이 원 전 원장 재임 4년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사실이 가장 놀라웠다.
하지만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지시말씀’이 ‘사실’인지 확인해야 했다. 사실 확인의 속도는 생각보다 더 느렸다. 전·현직 국정원 직원들의 입은 무거웠다. 한 직원은 “직장 오래 다니고 싶다”며 전화를 끊었다. 또 다른 직원은 모르쇠로 일관했다.
100개의 쓸모없는 말 중에서 한 단어씩 길어 올려 모았다. 외곽 취재도 빠뜨릴 수 없었다. 지시말씀에 나온 내용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광범위한 대상을 상대로 취재를 진행했다. 천개의 퍼즐을 한 개씩 맞추는 기분이었다. 이처럼 검증에 나선 많은 기자들의 노력으로 ‘지시말씀’은 세상에 공개될 수 있었다.
긴 시간을 들여 지시말씀을 보도하기까지 수많은 취재원들에게 빚을 졌다. 이 기회를 빌려 취재를 도운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는 말을 꼭 남기고 싶다.
‘지시말씀’ 보도 이후 원 전 원장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에 각종 고소·고발을 당했다.
최근에는 서울중앙지검에서 소환조사까지 받았다. 한 개인이 고초를 겪는 것을 보는 것이 달가울 리 없다. 그리고 원 전 원장이 겪는 고초에 ‘지시말씀’ 보도가 작은 몫이나마 했으니 개인적으로는 마음이 편할 리 없다.
하지만 문자 그대로 ‘피를 먹고 자라온’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고초나 개인의 불편한 마음보다 훨씬 무거운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다. 국가 최고 정보기관이 대선 기간 정치에 개입한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법적 판단은 기다려봐야겠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많은 국민들은 국정원이 부적절한 활동을 해왔다는 점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을 벌인 책임자들에게 죄와 벌의 몫이 공평하게 나뉘어져야 한다. 경찰은 안타깝게도 정의와 불의의 몫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경찰 수사와 달리, 검찰 수사에서는 모든 사실이 명백하게 밝혀지길 다시 한 번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