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청와대 정무수석실 작성 전달’ 추적」
한겨레신문 문화부 노형석 기자
“우리가 사물을 보는 방식은 우리가 믿는 것에 영향을 받는다.”
새해 벽두 타계한 영국의 예술지성 존 버거(1926~2017)가 남긴 유명한 명제다. 우리가 세상사를 보는 과정은 알게 모르게 이미지 뒤에 숨은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받는다는 뜻이겠다. 존 버거는 이 명제를 남성주의가 지배해온 서양회화사와 자본이 휘감은 대중광고 맥락에서 풀었다. 하지만, 기자는 청와대의 블랙리스트 작성전달 경위를 캐면서 버거의 명제를 섬뜩한 권력장으로 실감하게 되었다. 40여년 전 유신 이데올로기로 예술판을 편갈라 통제해야한다는 헛된 믿음과 망상이 한국 문화예술판의 운명을 실제 쥐락펴락했던 것이다.
지난해 10월10일 도종환 의원은 국정감사에서 블랙리스트의 실체가 있다는 근거를 처음 내보였다. 청와대 등 윗선의 보이지 않는 힘이 문화예술계 지원에 작용한다는 것으로 요약되는 문화예술위 회의록 원본. 이 사실을 손준현 <한겨레> 기자가 단독 보도하면서 블랙리스트 공방이 점화됐다. 그러나 누가 공모해 작성, 전달, 실행했는지 구체적 경위는 알 수 없었다. 조윤선 문체부 장관은 10월13일 국정감사장에서 당당하게 말했다. “그런 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고받았다.”
미묘한 언변. 왜 에둘러서 해명할까? 블랙리스트 작성 전달 경위를 파악해 예술인 탄압의 실체를 드러내야겠다는 발심이 일어났다. 10월 중순부터 오래 출입해온 문체부와 문화예술위, 문화계의 숱한 취재원들을 일일이 탐문했다. 발품 들인 끝에 2014~15년 청와대 김기춘 실장과의 교감 아래 조윤선 정무수석실이 교문수석실을 경유해 문체부, 문화예술위를 부리며 블랙리스트 공작을 진행한 전모를 처음 밝혀낼 수 있었다. 진실이 통하는 세상이 되어야한다며 털어놓은 취재원들 증언과 동료 선후배들의 ‘비선’ 메모가 원기를 주었다. 기자의 기사를 명백한 오보라며 언론중재위에 제소한 조윤선 전 장관은 이 글을 쓰는 지금, 구치소에 갇힌 채 장관직을 사퇴했다.
지난해 한국 전시에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참여미술의 거장 윌리엄 켄트리지는 “예술은 명백히 쓸모없는 것에 마음을 여는 것”이라고 털어놓은 바 있다. 적확한 말이다. 중심 아닌 주변을 기웃거리고, 불온하고 하찮은 것들을 엮어 새로운 세상의 밑돌을 놓는 이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참견하는 상상력’을 가두면 미래가 없다. 기자는 뒤늦게라도 그 ‘역행’을 막았다는 게 다행스럽다.
회차 심사평
제316회 전체 총평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사건의 진상과 진실을 밝혀내야 한다는 요구 역시 국민적 차원에서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번 316회 ‘이달의 기자상’에는 현장기자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상을 밝혀달라는 국민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땀을 흘린 기사들이 다수 출품됐다.
취재보도 1, 2 보도 부문에서 수상작으로 뽑힌 6편 모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관련 기사였다.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을 다룬 한국일보의 ‘세월호 선언 등 9473명, 문화계 블랙리스트 확인’, SBS의 ‘문체부 블랙리스트·관리지침 실물 공개’, 한겨레의 ‘블랙리스트 청와대 정무수석실 작성 전달 추적’ 기사는 예심과 본심 과정에서 세 편 모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땀흘린 기자정신을 잘 드러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한국일보는 박근혜 정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는 그간의 의혹을 실물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하면서 사건의 전체적인 규모를 전했고, 이를 이어받아 SBS가 그 리스트의 내용을 생생하게 파헤쳤으며, 한겨레가 작성 주체 특정 등을 규명함으로써 블랙리스트 생산 구조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3사 협업’ 보도가 된 셈이다. JTBC의 ‘김영재와 세월호 7시간’ 보도는, 김영재 원장의 ‘세월호 7시간’ 동안 행적을 밝혀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가 최순실씨와의 관계를 통해 현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았음을 부인하는 가운데, 김영재 원장 부인의 발언에서 취재 단초를 잡고 쓰레기통을 뒤져서 이를 반박하는 증거를 찾아내고 이후 심층취재를 통해 진상을 규명함으로써 ‘발로 뛰는 기자정신’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점이 평가됐다. 동아일보의 ‘정호성 녹취파일과 유출 기밀문건 추적’은 이 녹취록이 이미 검찰과 ‘박영수 특검’팀이 입수한 상태라는 점에서 결국 공개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기는 했지만, 단편적이고 부정확한 녹취록이 SNS 등을 통해 유통 되는 상황에서 ‘정확한 전문’을 통해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상작으로 뽑혔다.
한겨레의 ‘세월호 및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연속보도는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사건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올림머리’ 관련 단독보도, 황교안 총리의 세월호 관련 외압 및 인사보복 단독보도, 우병우 민정수석의 해경 상황실 압수수색 방해 외압 및 인사 농단 보도, 감사원 세월호 참사 발표에 대한 청와대의 수정 개입 보도 등 여러 개의 다른 단독 보도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명징하게 드러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기획보도 신문·통신 부문에서는 한국일보의 ‘세월호 수색 한창때 朴은 미용시술 흔적’보도와 경향신문의 ‘밥상 위의 세계’가 선정됐다. 한국일보 보도는 박근혜 대통령의 미용시술 여부를 밝히기 위해 취임 전 사진 1천여 장과 취임 후 촬영된 수만 장의 사진을 비교분석했다는 ‘창의적 발상’과 ‘노력’ 이 인정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경향신문 보도는 ‘밥상 위의 불평등’ 문제와 조류인플루엔자(AI)의 주 원인인 ‘공장식 축산’의 문제점을 사전에 정확하게 지적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지역취재보도 부문 수상작인 부산일보의 ’군기해이 軍 폭발사고, 줄줄 새는 국민 세금 막았다‘는 언론의 접근이 어려운 군 내부 취재를 통해 세금 낭비 상황과 함께 지자체가 국방 예산 일부를 부담하고 있음을 드러냈다는 점, 군 부대의 허술한 폭약 관리 실태, 해당 사단장의 소극적인 사건 대응을 보도함으로써 언론 본연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우리 언론은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한국 사회 발전에 장애물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무기력한 상황을 겪었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진실을 밝히는 역할을 하면서 다시 저널리즘을 구현하는 언론 본연의 존재감을 인정받고 있다. 제 317회 기자상 심사 때도 이같은 ‘인정’을 넓힐 수 있는 보도들이 앞다퉈 출품되기를 기대해본다.
(기자상 심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