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재착수 및 보도제작경위
① 단독취재( ◯ ), ② 단독기획( ◯ )
기자의 작은할아버지 이름은 설병곤, 창씨개명한 일본이름은 다마가와(玉川)다.
할아버지는 우리 집안의 큰 어른이자 가족 모두가 한평생 그리워한 대상이었다.
1914년생으로 일제 강제징용령에 따라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사할린으로 끌려갔다.
작은할아버지는 해방 후에도 돌아오지 못했고, 집안사람들은 돌아가셨다고 생각해 수십 년 간 제사를 올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1989년 일본을 통해 귀국하신 것이다.
고향을 떠날 때 30살 청년이던 할아버지는 45년 만에야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다시 돌아온 조국은 모든 게 허망했다.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면서 부모형제는 물론 부인까지 돌아가신 뒤였기 때문이다.
당시 기자는 어린 고등학생이었기에 할아버지의 속 깊은 내막을 알 수 없었다.
전후 세대에게 할아버지가 당한 고초는 그저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작은할아버지에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난해 우연히 러시아 교민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할린에 아직도 많은 강제징용자들이 살고 있고,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일본으로 이중징용당하거나 북한으로 들어가 연락이 끊겼다는 말을 들었다.
아직도 사할린 강제징용 문제가 끝나지 않은 것인가?... 놀람도 잠시,
이들은 왜 일본으로 이중징용 당했고, 남한 출신자들이 대부분인데도 북한으로 들어갔을까? 궁금했다.
이러한 주제는 강제징용 80년이 되도록 지금까지 한 번도 다뤄진 적이 없다.
강제징용 80년...사할린 이중징용·북송 징용자 최초 보도
일본제국주의가 1939년 7월 8일 국민징용령으로 이 땅에서 7백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을 죽음의 땅으로 끌고
간지 올해 80년을 맞았다.
당시 징용은 지역별로, 집집마다 숫자가 할당돼 모든 집안에서 남자들이 끌려갔다.
러시아 사할린은 해방 이후에도 징용자들이 반세기 가까이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통한의 땅이다.
기자의 작은 할아버지도 고향에 처자식을 두고 사할린으로 끌려가 1990년이 돼서야 돌아온 아픔이 있다.
당시 기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제징용의 의미를 모른 채 할아버지는 쓸쓸히 돌아가셨다.
취재를 위해 먼저 국내 사할린 영주귀국자 가운데 가족이 이중징용되거나 북한으로 입국한 사람을 찾았다.
이들 이야기를 통해 일제가 사할린에 살고 있는 조선인 징용자 가정에서 가장들만 일본으로 이중징용으로 끌고 간 뒤, 방치해 남은 가족들이 지금도 이산의 아픔을 겪고 있는 실태가 드러났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일본의 양심 있는 재야사학자들이 보관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당시 비밀 외교문서들을 통해 조직적으로 이뤄졌고, 일본 정부가 약속했던 배상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추가로 밝혀졌다.
두 번째로 북한으로 가족이 입국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접근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북한으로 들어간 가족과 연락이 끊겼지만 혹시나 모를 불이익을 걱정해 증언해주기를 꺼린 것이다.
기자도 징용자의 후손이라는 점을 들어 수차례 가서 만나고 설득한 끝에 인터뷰에 응해 주었다.
또 사할린에 있는 러시아 이민국과 한인협회를 통해 4천 명 가량이 러시아 하산 루트를 통해 입국한 사실들이 기록을 통해 입증되었다.
기자인 나는 나의 할아버지 이야기이자 우리 한민족 전체가 인류사에 유례가 없이 겪었던 비참했던 강제징용 역사를 이제는 제대로 추적해 밝혀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여러 난관을 뚫고 이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었다.
1년여 간 수십 회에 걸친 국내 취재와 4차례에 걸친 사할린, 일본 해외취재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이 작성한
비밀문서들을 단독 발굴해 일본이 정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한국인들을 노예처럼 이중징용 해갔고,
4천여 명의 징용자들이 남한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으로 북한에 입국했지만 남과 북의 외면 속에
지금도 또 다른 이산의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사실을 국내 최초로 보도하였다.
<취재 노트>
◯ 이중징용 : 일제가 조선인들을 사할린에 징용으로 끌고 간 뒤, 2차 대전 말 미군기의 공습으로
사할린에서 일본으로 물자이동이 어려워지자 일본 본토에서 탄광작업을 시키기 위해
사할린에 이주해 있던 조선인 징용자 가정에서 가장들만 다시 일본으로 끌고 간 징용
이중징용 때문에 징용자들은 일본에 남거나 한국으로 돌아와 사할린 가족과 생이별
했고,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생계가 끊긴 채 평생 혹독한 환경에서 살아야만 했다.
제작진이 일본 외교부 공식문서를 통해 확인한 사할린 이중징용자 수는 3,195명이다.
◯ 북송징용자 : 최소 3만에서 최대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할린 징용자의 70%는 남한 출신이다. 당시 북한은 인구가 적고 공업이 발달한 반면 남한은 농민이 대다수였기 때문이다.
일제의 토지 수탈로 남한 농민들은 자의반타의반으로 징용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이들은 해방 후 국제정세 변화로 남한에 돌아올 수 없었고, 북한이 러시아 나홋카에
영사관을 개설하면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초 대거 북한으로 이주한다.
북한이 통일되면 남한에 갈수 있고 대학까지 교육시켜주겠다고 선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북한의 거주이전제한정책에 따라 정착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상당수는 극심한 생활고로 사할린에 돌아오고 싶었지만 거부되었고, 일부는 국경을 몰래 넘다 총을 맞아 죽은 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북한으로 간 징용자 가족의 수는 4천명이라고 확인되고 있으며, 이들은 남한과
북한, 러시아, 일본의 무관심 속에 지금도 이산의 아픔을 겪으며 잊혀가고 있다.
2. 취재 및 보도과정의 특이사항 여부
① 기사에 등장하는 익명취재원의 상당성여하
② 제보자와의 특별한 이해관계여하
③ 직접취재(바이라인), 현장취재(데이트라인)여하
④ 기타 특이사항 여하
징용자 가장을 끌고 간 두 번의 이산, 이중징용 문서 최초 공개
일본정부는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강제징용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징용 관련 문서 공개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강제징용의 정확한 실체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기자는 일본에서 한인 강제징용문제를 평생 연구해온 나가사와 씨를 수소문 끝에 어렵게 만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들이 벌인 강제동원과 징용자료를 관심을 가지고 정리했다.
일본은 한반도 조선인들을 전쟁 소모품으로 쓰기 위해 탄광 등 징용지에 배치했고, 인간의 배고픔이 한계에 다다랄 정도의 식량 밖에 주지 않았다.
전쟁 말기 미군 공습으로 해외 탄광에서 석탄 운송이 어렵게 되자 사할린 등에 있던 강제징용 조선인들 가정에서 가족들을 그대로 둔 채 가장들만 일본으로 이중징용 했다.
나가사와씨 자료를 보면 조선인 징용자들이 이동한 탄광 이름과 배치시간, 인원 수 등 모든 내용이 담긴 일본 정부 극비 자료들이 최초 공개된다.
<일본 이중징용자 유족과 일본 정부 극비 문서>
징용지에 남겨진 조선인 가족들은 가장이 집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평생 기다렸다.
그러나 이중징용자 상당수는 미군 폭격과 일본군의 학살로 생을 달리하고 말았다.
고국의 외면 속에 북으로 간 동포 4천 명 발굴 보도
2010년 사할린에서 부산시로 부인과 함께 영주 귀국한 한인 1세대 김현차 씨,
그의 이름은 3개다. 한국 이름 현차, 일본 이름 겐지, 러시아 이름 니콜라이.
사할린에서 국적이 3번이나 바뀐 것이다. 그의 삶은 굴곡진 한민족 역사 그 자체이다.
그의 부모는 1930년대 가족 전체를 이끌고 고향인 제주도를 떠나 사할린으로 징용됐다.
해방 후 그의 부모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음에 절망하고 만다.
북한은 1950년대 들어 사할린에 있던 한인동포들에게 곧 통일이 될 테니 고향과 가까운 북으로 이주할 것을 권했고, 김 씨 부모는 러시아 대학에 다니는 김현차 씨를 제외한 가족들을 데리고 북한 황해도로 이주한다.
김현차 씨 가족처럼 1950~196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사할린 동포는 4천 명에 이른다.
이주를 하게 된 계기도 김현차 씨 가족처럼 고향에 가기 위해서였다거나 북한 당국이 김일성 대학에서 무료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고 선전한 이유가 가장 컸다.
이는 러시아 사할린 이민국 문서와 사할린한인회를 통해 관련 자료가 최초 공개된다.
<일가족 모두 북한으로 이주한 제주 출신의 김현차-겐지-니콜라이>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곧 통일이 된다던 북한의 선전과 달리 남북 대치 속에 통일은 멀기만 했다.
북한으로 간 동포들은 거주 이전 자유가 제한돼 사할린으로 돌아올 수도 없었다.
일부는 러시아로 오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다가 북한군 총에 맞아 죽기도 했다.
사할린에 남은 사람들은 북한에 있는 가족 방문이 허용됐지만 교류가 오래가지 않았다.
북한으로 간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도와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현차 씨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은 인생 황혼기를 갈수록 깊어만 간다.
부모형제는 북한으로, 자식은 러시아에 남아 가족 모두가 뿔뿔이 헤어졌다.
한민족 강제징용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일본의 야욕과 살아 있는 일본인의 양심
일본은 도쿄 야스쿠니 신사가 일본의 정신을 대표한다고 말한다.
야스쿠니신사 박물관에는 전범들을 우상화하는 각종 전시물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한반도에서 조선인 수백만 명을 강제동원해 2차 대전에 희생시킨 일본은 여전히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열린 강제징용 배상판결을 거부하고 모든 보상은 1965년 한일협정으로 끝이 났다고 주장한다.
<도쿄 야스쿠니 신사와 일본의 영웅으로 추앙 받는 전범들>
그러나 한일협정은 강제징용 피해자 개인에 대한 현금성 보상이 아니다.
국가 간 기업설비 지원 등 차관 형태로 이뤄졌기 때문에 개인 배상권 청구 길은 열려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일본 정부는 과거 연합국과 맺은 샌프란시스코 평화협정 등을 통해 개인 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바 있다.
일본은 전후 배상에 있어서 중국과 달리 한국은 철저히 무시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일본은 또다시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그들에게 강제징용 조선인은 자기들 목적대로 쓰고 버리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인권변호사 다까기 씨와 그가 써준 기자의 할아버지 초청장>
일본 도쿄에서 인권변호사로 활약하는 일본인 다까기 씨,
26살부터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한 인권변호사로 활동해온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는 1980년대에 한국에 있는 친척 명의로 사할린에 초청장을 보내 주었다.
그 덕에 우리 동포 약 1천 명이 꿈에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 모든 작업은 자신의 돈을 써가며 오로지 자원봉사로만 이뤄졌다.
기자도 작은 할아버지가 사할린에서 귀국했다고 말하자, 그는 비서를 통해 자료를 뽑아주었다.
그 순간 나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 서류를 받을 수 있었다.
그가 1989년에 나의 할아버지를 위해 초청장을 써 주었고, 할아버지가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까기 씨는 자신이 1천 명이나 되는 많은 한국인들을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줬지만,
그 후손이 자신을 찾아온 건 기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기자는 너무나 고맙고 미안해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돈 벌 수 있다”고 떠난 징용, 그곳은 지옥이었다
일제강점기 강제 징용된 조선인의 약 70%는 남한지역 농민 출신이다.
지하자원이 많아 공업이 발전한 북한과 달리 일제 착취로 농토를 뺏긴 농민들은 “돈 벌 수 있다”는 말에
징용을 떠난 사람이 많았다.
부산항을 떠난 그들을 기다리는 건 노예 생활이나 다름없는 지옥이었다.
일본인 감독자들의 감시 하에 조선인들은 목숨 걸고 탄광으로 들어가 작업을 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 각종 사고가 잇따랐다.
숨진 조선인 작업자는 몰래 버려졌고 강제징용 루트 곳곳에는 그렇게 방치된 수많은 조선인 무덤이 있다.
<일본 교토에 있는 강제징용 탄광과 조선인 사망자 서류>
일본 교토 망간 탄광기념관에는 평생 강제징용 노동자들의 실상을 알려온 재일교포 2세 이정호씨가 있다.
강제징용 된 조선인 노동자의 아들인 그는 생생히 말한다.
“지옥 같은 환경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숨 바쳐 일하다 희생됐습니다.
일본인들은 밖에서 여흥을 즐기다가 조선인이 죽으면 그냥 산에다 갖다 버렸습니다.”
연합국 기록물 보관소의 징용루트 팩트 확인 보도
<사할린 역사기록소 쿠진 박사와 미 육군 하와이 자료관>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이었던 러시아와 미국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에 대한 사료가 남아 있다.
2차 대전 직후 걸인 같은 행색으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조선인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조선인 징용역사 연구에 평생을 바친 러시아 쿠진 박사.
그는 사할린에 있던 남한 출신 징용자 가운데 북한으로 간 사람이 4천여 명이었다고 최초로 밝혔다.
그리고 반문한다 “한국은 왜 이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느냐”고...
징용자...그리고 남겨진 아픔의 구술과 증언 기록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자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1세대들이 여전히 건재하다.
올해 95살의 이희팔씨는 일본 도쿄의 한 이름 없는 요양원에 홀로 방치돼 있다.
이 씨는 16살에 강제 징용돼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1950년대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일본에서 날품팔이와 막노동일로 생활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사할린에서 돌아 오지 못한 동포들을
위해 귀환운동을 벌인 주역이다.
지금은 늙고 병들어 일본 요양병원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강제징용 1세대로 일본 요양원에 홀로 방치된 이희팔씨>
이희팔 씨는 어려운 경제 형편 속에서도 강제 징용된 동료들의 고국 귀환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지금은 노후자금이 없어 일본 정부의 기초생활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일본인 부인 명의의 일본인으로 살아
가고 있다.
그는 기자를 보자마자 너무 고맙다며 눈물부터 흘렸다.
우리 조상인 조선인, 아버지가 눈물을 보인 이유는 무엇일까?
저마다 털끝만큼의 손해도 보지 않으려고 나라 탓을 하며‘헬 조선’을 외치는 이 시대에 너무나 순박한
그를 보자 기자는 조금 화가 나서 물었다.
“해방이 됐는데도 데리러 오지 않는 남한 정부에 대해 왜 따지지 않았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나의 머리를 한 대 때린 것처럼 다가왔다.
“해방 이후라 나라도 힘들 텐데 우리까지 요구하면 나라가 더 어렵지 않겠어요?...”
나라가 없으면, 그리고 나라가 있더라도 힘이 없으면 국민이 어떻게 되는지를
나(기자)는 현세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꼭 전하고 싶다.
3. 타 매체 선행보도 여부 및 타 매체의 반향
(선행보도 또는 타 보도에 관한 표절여부도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사할린 동포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보도는 그동안 언론에서 수없이 많이 다뤄져왔다.
하지만 대부분 현세대 이산 문제에 치중해 “이산의 고통을 겪었다...”거나 “국회에서 관련법을 제정해 대책을 세워야 한다...” 등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징용자들의 증언을 단순히 듣는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까지 이중 징용되거나 고국으로 가기 위해 북한행을 택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없었다.
본 프로그램은 1년이 넘는 제작기간 동안 남한과 북한, 러시아, 일본에서 발굴한 다양한 외교문서와
징용자, 그들 자녀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사할린 이중징용과 남한 출신 북송 징용자들에 대해
국내 방송 최초로 보도하였습니다.
4. 사회에 끼친 영향
(후속적인 제도개선 등이 이루어진 사정이 있으면 이를 언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일본군을 따라 아시아 각지로 끌려갔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지만 그들의 주검은 여전히 버려지고 잊혀졌다.
<미얀마와 중국 해남도 강제징용자 이동경로와 학살지역>
오키나와와 해남도, 미얀마는 천혜의 자연환경으로 지상낙원이라 불린다.
아름다운 자연과 따뜻한 기후로 유명 관광지마다 해마다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방문해 관광을 즐긴다.
그러나...
이곳이 일제강점기 조선인 징용자들이 희생된 곳 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중국 해남도의 조선촌.
이곳에는 운동장 몇 배 크기의 광활한 묘지가 있다.
누가 죽었는지 표지도, 봉분도 거의 없는 이곳은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학살로 숨진 조선인 노동자 1천
명의 무덤이다. 일부 무덤은 내부가 공개돼 손이 뒤로 묶인 채 숨진 조선인들의 주검을 볼 수 있다.
수십 년이 지나 사체는 훼손됐지만, 이들이 입었던 복장을 통해 이들이 조선인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우리 정부는 특별조사단을 파견해 해외에 방치된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의 무덤을 조사하고 있다.
전투가 치열했던 일본 오키나와와 중국 해남도, 타이, 미얀마 등지에는 이름 없이 죽은 수많은 조선인 혼령들이 조국의 외면과 일본의 잔학성 앞에 억울하게 잊혀지고 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년을 맞았다.
이보다 잘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강제징용이 시행된 지도 올해 꼭 80주년을 맞았다.
일제의 가혹한 압제로 이 땅의 거의 모든 아버지들이 끌려가 희생된 역사 알리기는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방송 이후 재방송은 물론 지역방송을 넘어 전 국민이 SNS, 유튜브 등을 통해 널리 볼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이어졌다.
특히 울산MBC 시청자위원회는 방송내용을 일본어로 번역해 일본에서도 볼 수 있도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러한 여론이 모아진다면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도 머지않아 마련될 것으로 기대한다.
이번 제작을 통해 느낀 점은
강제징용을 바라보는 일본과 한국 국민의 인식차이가 너무나 크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에 대해 사과하고 지금이라도 희생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해자의 망각 때문일까?
일본인들은 강제징용이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다.
일부 알더라도 1965년 한일협정으로 모든 것이 해결됐다고 보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의미에서 강제징용 프로그램 제작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현재 진행형이다.
한국에서 기자로 일하는 사람으로서 한국과 일본 양국 국민들이 서로 역사의식을 공유할 수 있도록
강제징용의 진실을 발굴해 앞으로도 계속 알리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자체평가 및 소속사확인여부
강제징용 80주년을 맞아 1년이 넘는 제작기간과 어려운 외교 비밀자료 발굴을 통한 심층 취재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할린 이중징용과 북한으로 간 징용자 실태를 국내 최초로 단독 보도하여
한국과 북한, 러시아, 일본 정부의 강제징용자 배상과 이산문제 해결을 촉구하였다는 점에서
지역방송에서 보기 드문 우수한 프로그램을 제작·방송하였다고 평가합니다.
6. 기타 고려사항
(외부 지원여부, 보도당사자의 반론신청, 언론중재위원회에의 피신청사항이 있으면 이를 언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해당사항 없습니다.
회차 심사평
제344회 전체 총평
한국기자협회의 제344회 이달의 기자상 심사 결과 총 6편의 작품이 최종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취재보도 1부문 심사에서 SBS의 <정준영 휴대전화로 드러난 ‘연예계-공권력’ 유착비리>, 조선일보의 <‘고위공직자 재산 추적’ 연속 보도>, SBS의 <인보사, 종양 유발 위험…허가 과정의혹> 등 세 작품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SBS의 <정준영 휴대전화로 드러난 ‘연예계-공권력’ 유착비리>는 휴대전화 속에서 독버섯처럼 퍼져나간 중대한 사회 현안을 선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집요하게 이슈화했고, 끈질긴 취재를 통한 후속 보도로 사건화하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들 일행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국내외 피해 여성을 직접 만나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함으로써, 사건의 전모와 심각성을 대중에게 널리 알린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이들의 성폭행 규모와 유형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판단, 후속 보도를 통해 경찰수사를 이끌어낸 데 대한 심사위원들의 호평이 이어졌다.
조선일보의 <‘고위공직자 재산 추적’ 연속 보도>는 심사위원들이 조선일보의 단독보도인지 여부를 놓고 치열한 토론을 벌였고, 최종적으로 조선일보 보도가 김의겸 전 청와대 대변인의 재건축 건물에 대한 대출과정과 부동산 투기 축소 신고 등을 집요하게 취재해 고위공직자의 해이한 부동산 보유과정을 낱낱이 파헤쳤다는 점을 평가받아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이 보도는 김 전 대변인이 정부가 수많은 부동산 규제를 통해 재건축·재개발 투자를 억제하는 와중에 재개발 건물을 샀다는 점, 부동산 투기 축소 신고와 그 과정에서의 대출 의혹에 관한 후속 기사를 3차례에 걸쳐 연속 보도함으로써 대변인 사퇴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점이 수상을 확정짓는 결정타가 됐다. 이 과정에서 심사위원들은 타 언론과의 최초 보도시간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고, 치열한 취재정신과 후속 보도에 따른 파급 효과 등을 전반적으로 고려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SBS의 <인보사, 종양 유발 위험…허가 과정의혹>은 전문성 부족 등에 따른 취약 분야인 제약부문에서 집중적인 추적보도를 펼친 결과, 국내의 취약한 신약 허가과정의 의혹을 파헤쳤다는 점이 인정돼 수상작 선정의 영예를 안았다. 특히 제약분야의 특성상 난해한 전문용어 해석과 신약 개발과정 분석에 따른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신약 검증과정의 허점과 관련 논문의 문제점을 낱낱이 분석하는 등 집요한 취재를 통한 보도가 돋보였다는 호평을 받았다. 특히 의학전문기자를 중심으로 인보사의 성분과 허가 과정에 대한 집중 취재를 시작해, 인보사의 핵심 성분인 ‘293세포’가 종양 유발 가능성 세포라는 사실을 파헤치는 등 끈질긴 후속보도를 한 점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기획보도 신문·통신 부문에서는 조현병 환자가 이웃, 주민과의 갈등 속에 벌인 폭력이 살인까지 이어진 사건을 집중적으로 취재보도한 중앙일보의 <‘안인득 어떻게 괴물됐나’…42년 안인득을 따라가 참사 전조 파악> 보도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특히 범인이 이웃 주민 집에 찾아가 오물을 뿌리는 영상을 단독으로 입수해 보도하는 등 그의 평소 기행과 끔찍한 사건을 벌인 범행과정 전반을 집중적으로 파헤침으로써, 조현병 환자가 벌일 수 있는 심각한 범행에 대한 높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평가됐다. 또 매 단계마다 드러난 사회 제도의 미비점을 조목조목 짚는 방향으로 기획 내용의 범위를 넓힌 점도 좋은 평가를 받은 요인이 됐다.
한겨레신문의 <여의도 농부님, 사라진 농부들>은 국회의원의 농지매입 과정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낸 수작이었다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일치된 평가였다. 국회의원 재산 공개내역을 통해 파악한 국회의원 소유의 논과 밭을 제보자, 취재원, 조력자 없이 오직 노트북 한 대를 들고 홀로 전국을 돌아 발로 뛰는 현장 취재를 통해 파악해낸 결과라는 점도 호평을 받았다. 특히 중앙언론사의 기자가 전국 각지의 지역 취재현장을 누비며 심층취재를 통해 보도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받았다.
지역 취재보도 부문에 출품한 부산일보의 <미군, 부산항 8부두 생화학 실험의혹> 보도는 미국 국방부가 부산항 8부두에서 올해 수백만 달러의 예산을 쏟아부어 생화학 실험이 포함된 이른바 ‘주피터 프로젝트’를 계속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것을 미 국방부의 문건을 통해 확인했다는 점이 호평을 받았다. 이 보도는 문건에서 이 프로젝트가 ‘살아있는 매개체’ 실험이 포함돼 있다고 명시된 가운데 미국 내 사막 한가운데서 하는 실험을 부산항 8부두와 같은 인구밀집 지역에서 한다는 것은 매우 큰 문제라는 전문가의 우려도 제기했다. 다만, 이번 보도는 ‘생화학 실험’의 실행 여부를 실체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었지만, 주한미군 관련 보도의 특수성과 함께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집요하게 취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최종 수상작 결정이 나왔다.
기자상 심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