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기
수상 기자가 직접 쓴 1인칭 기록 5편
남겨진 아이들, 그 후 서울신문
남겨진 아이들, 그 후
서울신문 장진복 기자
겨울의 끝자락이었던 지난 2월 찾아간 한 보육원에서는 돌쟁이 아이 3명이 신나게 뛰어 놀고 있었습니다. 엄마(보육사)를 바라보며 방긋 웃는 아이들의 모습은 여느 또래와 다를 바 없이 몹시나 평범했습니다. “발레 학원에 보내달라”며 조르던 7살 소연(가명)이와 방학 숙제가 하기 싫어 딴청을 피우던 9살 호영(가명)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일반 가정 아이들의 성장 환경만큼 평범하지만은 않습니다. 시설보호아동들은 보육사의 3교대에 따라 엄마가 하루에 3번 바뀌는 것에 혼란을 느끼고, 더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을 과격한 행동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서울신문의 ‘남겨진 아이들, 그 후’는 시설보호아동들이 성장 단계별로 직면하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조명하고자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아이들은 애착형성부터 문제행동, 학습격차, 진로고민까지 생애주기에 걸쳐 다양한 어려움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최대한 아이들의 입장에서 어떤 지원책이나 제도가 필요한지 고민을 거듭했습니다.
더이상 부모와 함께 할 수 없는 보호대상아동들을 적절하게 돌보는 것은 우리 사회의 몫입니다. 그러나 시설보호아동은 늘 사각지대에 몰려 있고 소외돼 있었습니다. 당장 먹고 사는 게 힘들어 꿈을 포기하고 건설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는 보호종료아동 민솔(가명)씨에게는 응원의 말을 건네는 것조차 조심스러웠습니다.
이런저런 우려 속에도 인터뷰와 설문조사에 응해준 보호아동과 종사자, 관계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가장 힘이 돼 준 아들과 응원을 아끼지 않은 가족들에게도 특별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편집국장과 사회2부 부장, 차장, 부원들의 따듯한 도움으로 부족했던 ‘남겨진 아이들, 그 후’가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기사가 나와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에요.” 인터뷰를 위해 만난 한 보육원 종사자는 기자에게 자조 섞인 말을 전했습니다. 이번 수상이 나비효과가 돼 남겨진 아이들이 더 밝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길 기대해 봅니다.
동해안 수협 부실운영 실태 고발 G1
동해안 수협 부실운영 실태 고발
G1 조기현 기자
수협에 20년 간 1581만원의 출자금을 납부한 한 어민은 조합에서 퇴출되면서 88만원 밖에 돌려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평생 어업에 종사하며 수협의 발전에 기여했고, 이제 나이가 들어 수협 조합원 자격을 잃은 70대 조합원. 그런데 해당 조합원은 노년을 위해 적금처럼 들어놨던 출자금 가운데 88만원 밖에 받지 못하게 된 겁니다.
사실 수협은 협동조합이고 조합원의 출자금이 손실을 봤다면 당연히 조합원도 손실 부담을 떠안게 되는 게 합당합니다. 하지만 손실의 이면에는 수협의 부실 경영이 있었고, 퇴출당하지 않은 조합원은 출자금을 그대로 보장받게 되는 불평등이 존재했습니다. 수협의 부실 경영 문제를 파헤쳐 수협에 헌신한 나이 든 어민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게 기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해당 수협의 경영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습니다. 시장 조사도 없이 무리하게 수산물을 수입했다가 판로를 못 찾아 썩히는가 하면, 수입 가격보다도 싸게 물건을 넘기기도 했습니다. 직원의 업무 미숙으로 업체로부터 받지 못한 돈도 24억원입니다. 이렇게 조합원 출자금 27억9000만원 가운데, 손실된 금액만 23억4000만원에 이릅니다. 반면 조합장은 수협 돈을 개인의 장사를 하는데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피해는 온전히 퇴출 조합원들의 몫이었습니다. 전체 조합원 254명 가운데 퇴출 조합원 133명이 납입한 출자금은 모두 14억원이지만, 돌려받은 돈은 고작 3.74%에 불과했습니다.
취재팀의 보도 이후 해당 수협 조합장은 조합장 직을 사퇴했습니다. 동해해경청 광역수사대는 해당 조합장의 비위 사실에 대해 수사를 벌이고 있습니다.
본 취재는 수협의 부실 경영 실태를 조목조목 고발함으로써 수협의 공적 책임을 강화하게 하고, 수협 조합장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도 환기하는 기회를 마련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피해를 떠안게 된 어민들에게 구제 방안을 마련하도록 여론을 만들고, 이사회의 자구책 마련을 이끌어 냈다는 점에서 어민들의 눈물을 닦아 준 보도였다고 자평합니다.
모아저축은행, 58억 새는 동안 내부 감시 작동 안했다…
모아저축은행, 58억 새는 동안 내부 감시 작동 안했다
경인일보 정운 기자
인천에 있는 모아저축은행은 지역에 있는 4개 저축은행 중 가장 큰 규모다. 취재를 시작한 것은 모아저축은행 직원이 60억원을 횡령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다. 정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 금융감독원, 저축은행 업계 등 여러 방향으로 취재를 진행했고,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모아저축은행도 관련 사실을 일부 인정하면서 첫 단독보도를 하게 됐다.
모아저축은행 직원이 빼돌린 금액은 58억9000만원. 작지 않은 금액이다. 금액이 크다고 하더라도 다른 기업이었다면 해당 직원에 대한 징계와 처벌 등으로 마무리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금융기관인 저축은행은 다르다. 금융기관의 부실은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인천지역 저축은행 여러 곳이 문을 닫은 ‘저축은행 사태’가 터진 지 10여 년 밖에 되지 않았다. 저축은행에 돈을 맡기면서도 ‘제2의 저축은행 사태’를 불안해하는 이들은 아직도 있다.
이 때문에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사건의 원인을 찾고 개선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해당 금융기관에도 도움이 될 것이고, 장기적으로는 저축은행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에도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보도가 이어지면서 저축은행중앙회의 시스템 개선이 이뤄졌고, 다른 저축은행들도 내부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이번 사건은 한 개인의 일탈로 치부될 수 있는 사안을 시스템 개선까지 이뤄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였다고 생각한다.
취재 과정에서 여러 기자들의 협업이 잘 이뤄졌다는 점도 긍정적이다. 첫 정보를 접한 이후 인천본사 편집국장을 포함해 많은 선배들이 취재 방향 등에 대해 함께 고민했다. 논의 내용을 토대로 후배들과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과정이 유기적으로 진행됐다.
이번 보도는 내부적으로는 유기적인 협업이 이뤄졌다는 점에서, 대외적으로는 지역언론이 가져야 할 지향점을 조금이나마 보여줬다는 점에서 내외부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도 지역 언론인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데 있어 이번 경험이 자양분이 될 것으로 믿는다.
128년 전 제천서 조직된 국악단체…국내최초 ‘국악…
128년 전 제천서 조직된 국악단체…국내최초 ‘국악관현악단’ 타이틀 관심
중도일보 손도언 기자
지난해 11월 중순. 한 취재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국악단체가 제천시에 존재했다’는 얘기를 해줬다. 그의 주장은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일단 제천시는 국악의 고장이 아니다. 무엇보다 석탄과 시멘트, 잿빛도시 등의 부정적인, 즉 삭막하고 딱딱한 도시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이런 도시에서 국악단체가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사실 여부, 즉 ‘확인’은 해야 했다. 제천시청 문화예술과로 달려 갔다. 그러나 문화예술과 직원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제천 시민들은 이 내용에 대해 몰랐다.
제천지역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서적은 없을까. 그런데, 서적은 존재했다. 바로 1969년 제천군지 편찬위원회가 편찬한 ‘제천군지’다. 며칠 동안 한자사전을 찾아가면서 내용을 파악했지만 수확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한문학자에게 의뢰했다. 의뢰결과 취재원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국악단체가 제천지역에 실제로 존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단체 청풍승평계였다’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망치로 크게 한 방 맞은 느낌이었다.
제천 국악단체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제천 국악단체가 존재했던 지역은 ‘내륙의 바다인 청풍호’다.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인해 청풍호는 수몰됐고, 수몰지역이 제천 국악단체 청풍승평계 창단 장소이자, 근거지였다. 기록만 있을 뿐 국악 악기 등도 모두 물속에 잠겼다. 제천시 청풍호반을 매일 찾다시피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무작정 운전대를 청풍호로 돌렸다. 청풍호 인근 지역민을 만나기도 했고, 어떤 날은 종일, 물속만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낯선 인물이 알려준 이름 석 자 ‘이금복’. 이금복은 청풍승평계 단원의 후손이었다. 그러나 이금복은 사망하고 없었다. 이금복의 후손을 찾아야 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석 달 만에 청풍승평계 4대 후손인 이금복씨 딸을 만나 인터뷰했다. 그는 “청풍지역에서 국악단체가 실제로 존재했고 증조할아버지에게 실제로 들었고 가야금과 거문고, 대금 등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했다”고 말했다. 그의 제적등본을 입수해 제천군지의 기록과 대조했는데, 100% 일치했다. 모든 게 사실이었다.
역사에 손놓은 대구 TBC
역사에 손놓은 대구
TBC 박철희 기자
70년 세월의 녹을 벗겨내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옛 대구시립박물관 사진 한 장 남은 게 없고 기억하는 이들도 사라진 탓이었다. 주저주저 어렵게 취재를 결심했지만 시작하고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틈틈이 과거 자료를 찾고 유물 도록들을 대조하고 전문가 조언도 구하러 다녔지만 한두 달 일상 취재를 하다 다시 수첩을 펼칠 때면 어느새 머릿속이 하얘져 원점으로 돌아가는 악순환이었다.
누군가는 기억해야 역사인 것을, 여기서 그만두면 70년 전 대구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까 두려웠다. 당시 공문서를 깨알같이 채록한 아흔 살 노교수의 ‘대구시립박물관 관련 노트’, 대구시 기록관에서 마주친 ‘주인 잃은 박물관 열쇠’는 어렵사리 취재를 이어간 동력이었다
시립박물관 도난 유물에서 시작된 보도는 대구시장의 시립박물관 건립 공약 파기, 27년째 방치된 지역사 편찬, 그리고 일그러진 대구시의 역사 인식으로 이어졌다. 짧지 않았던 취재 과정 내내 확인했던 건 역사를 대하는 대구시의 빈약한 의지였다. 역사문화 정책에 대한 뚜렷한 밑그림은 찾기 힘들었던 반면 관광객을 모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이우환, 이건희, 간송 미술관 사업에는 수백, 수천억 예산을 투입할 의지를 내비치며 적극적으로 나서기도 했다. 취재 과정에서 접한 다른 시·도의 관계자들은 하나 같이 ‘역사에 손놓은 대구’의 현주소를 안타까워했다.
우리의 보도가 대구라는 ‘오래된 우물’의 과거와 현재를 풍성하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됐으면 한다. 비록 한 해 수만 명씩 대구를 떠나는 현실이지만 ‘오래된 우물’에서 솟아난 우리 동네 역사 이야기들이 지금 대구에 사는 이, 대구를 떠난 이와 떠날 이들의 머릿속에 알알이 들어가 박혀 대구를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고, 대구를 그리워해 다시 찾을 수 있게 마음의 씨앗이 됐으면 좋겠다.
허점 많고 부족한 취재였지만 큰 상을 주신 한국기자협회와 심사위원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취재를 이끌어 주신 정병훈, 김명수 선배께도 고맙고 함께 취재한 권준범, 이상호, 김남용 기자께는 더 가치 있고 훌륭한 후속 취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