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재착수
② 단독기획( √ )
2. 보도제작경위 -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술해 주십시오.
-대전 보문산은 대전역에서 직선으로 2.1㎞ 떨어진 곳에 있는 걸어서 40분 정도면 도착하는 산(457m)입니다. 한때는 케이블카가 운행되어 대전시민들의 나들이 장소였고, 지금도 가볍게 나들이하거나 등산하는 장소입니다. 이곳에 알려지지 않은 동굴 1개를 제보받아 2023년 8월 취재했고, 주민들의 말씀을 수집한 결과 그동안 우리가 모르던 동굴이 더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동굴을 찾는 탐사를 두 달간 진행했습니다. 동굴에 대한 막연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탐사는 발견하는 동굴이 늘어날수록 누가 언제 그리고 왜 동굴을 만들었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게 더욱 놀랍게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보문산 자락에 있는 호동과 석교동, 부사동 일원을 돌아다니며 마을 주민들 30여 명을 인터뷰했고, 관련 연구논문 10여 편과 책도 도서관에서 빌려 연재물을 기획했습니다. 대전시민들에게 가장 친숙한 보문산에서 그동안 알지 못하던 동굴 7개를 발견했고, 곡괭이 흔적과 화약구멍이 있으며, 여러 자료와 주민 인터뷰를 통해 자원개발 목적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을 대비한 전쟁 유산 가능성을 논리적으로 풀어내고자 다섯 차례 기획보도를 연재했습니다. 대전에서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에 의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시설물이 발견된 것은 보문산 동굴이 처음이어서, 발견부터 조성 시기와 목적을 추적하는 기사가 모두 처음 보도되는 내용이었습니다.
3. 취재 및 보도과정의 특이사항 여부
-동굴은 보통 입구가 밖으로 드러나 눈에 띄기 쉬우나 대전 보문산에서는 달랐습니다. 입구에 개인이 집을 지어 동굴을 창고나 휴게실처럼 사용해 주택이 들어서기 전부터 거주했던 주민이 아니고서는 그 집 뒤쪽에 동굴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찾는 보문산이면서 동굴의 존재는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 언제이었을지 가늠되지 않을 시절에 입구를 벽돌로 막아 더 이상 왕래할 수 없도록 하고 수풀을 조성하고 등산로에서 보이지 않도록 함으로써 동굴의 존재는 중도일보가 기획보도 하기 전까지 수면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도시개발 과정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동굴도 마을 어른들의 증언을 모아서야 재현할 수 있었습니다.
관찰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입구에 주택을 짓고 동굴을 휴게실처럼 사용하는 주민은 자기집 뒷마당에 있는 동굴을 보여주기 꺼려했고, 어렵게 설득해 기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으나 사진촬영을 못할 정도로 취재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취재에서 발견하지 않은 동굴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취재 초기에는 보문산 일대의 동굴이 과거 자원개발을 목적으로 조성됐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암반을 뚫어 최대깊이 50m까지 파고들려면 개인이나 마을단위 노력으로는 불가능하고, 많은 인력과 장비를 동원했을 것인데 기업이 투자하는 자원개발 때 가능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대전대학교 교수의 도움으로 조선총독부 관보를 찾아보았을 때도 대전에서 석탄과 금광 개발이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었으나, 보문산은 아니었습니다. 또 주민들의 말씀을 종합하고, 동굴의 깊이가 깊지 않고 암반의 성분을 보면 자원개발은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석탄과 금광개발 때 수백미터를 굴착하나 보문산에서는 최대 50m 깊이였고, 이 정도 깊이에서 자원을 캐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또 조선총독부 관보에 게시된 금광과 석탄광은 대전 신탄진과 식장산의 외곽지역에 있는 것으로 주소지가 기록되었고, 보문산에 이러한 자원개발 행위가 있었다면 주변의 농토가 오염돼 지금까지 대를 이어 증언이 나왔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6.25전쟁 때도 인민군의 대전점령 기간이 동굴을 조성할 정도의 시간은 되지 않았으며, 우리군과 미군 어디서도 대전에 동굴을 팠다는 기록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정도까지 취재가 이뤄진 뒤 대전에서 일제 강점기를 기억할 수 있는 원로를 찾아다녔고, 결국 96세 원로기업인을 자택으로 찾아가 인터뷰한 끝에 대전중학교 재학 때 보문산 동굴 조성 현장에 근로동원되었고, 현장에는 일본군과 군속이 지휘하고 있었다는 증언을 수집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 소제동 철도관사촌 등의 일제강점기 시설은 잘 알려졌으나, 태평양전쟁에 대비한 반공호 등의 전쟁유산은 대전에서 발견되거나 보고된 사례가 없습니다. 문화재청이 2015년 수행한 대전지역 태평양전쟁 유적 조서에서도 대전에 남은 유적은 없다고 보고되었습니다. 보문산 동굴은 새로운 발견이면서 그동안 기록되지 않은 역사적 증거이며 원로기업인의 인터뷰는 중요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취재기간 임병안, 김지윤 기자는 수풀이 우거진 보문산에서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 위치한 동굴을 찾아 산속을 헤맸고, 뒷받침할 증언을 수집하기 위해 마을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했습니다. 특히, 앞선 연구자가 보문산 동굴의 위치를 알려주고, 기자가 단순히 주소대로 찾아가 확인하는 방식의 취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동굴 한 곳에 정보를 가지고 그마저도 입구에 집을 지은 거주자를 설득한 끝에 보문산 동굴 1호를 확인한 뒤 여러 주민들과 지역 학자들을 취재해 2호부터 7호까지 취재기자들이 발로 뛰어서 찾은 사안입니다.
4. 타 매체 선행보도 여부 및 타 매체의 반향
보문산 동굴의 존재를 알리거나 가능성을 제기한 선행 보도는 없었습니다. 보문산 동굴을 발견하거나 이에대해 주목한 적이 전혀 없었습니다. 민방위 훈련이나 아니면 마을 아이들이 수시로 들락거려 치안 상의 이유로 동굴입구를 벽돌로 막았음에도 이에대한 보도는 없었으며, 보문산 전체가 아닌 그 마을에만 어쩌다 만들어진 동굴에서 벌어지는 일로 주민들은 여겼습니다. 서울 한 방송사에서 프로그램 제작 목적으로 동굴에 대해 묻고 주소지를 요청한 사례가 있습니다.
5. 사회에 끼친 영향
일제강점기 대전에 많은 일본인이 거주하며 도시의 골격을 세운 곳입니다. 대전역과 옛 충남도청, 소제동 철도관사촌 등이 대표적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남긴 시설입니다. 일제가 무모하게 전쟁을 벌인 태평양전쟁과는 관련 없는 대전은 평화로운 도시처럼 그동안 여겨졌습니다. 특히, 보문산은 일본인들이 근처에 신사를 세우고 후지산이라고 부를 정도로 주목하고 그때부터 위락장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최근까지 대전 시민들은 일제강점기와 보문산에 대해 지금까지 서술한 정도까지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중도일보 보도를 계기로 태평양전쟁 말기 본토결전을 위해 부산과 제주에 그랬던 것처럼 대전 보문산에도 방공호 또는 대피 목적의 동굴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또 동굴 조성에 근로동원이 있었음을 원로 증언을 통해 각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번 취재를 통해 대전 역시 태평양전쟁을 대비하는 예비 전장이었으며, 대전역과 소제동 철도관사촌과 성격을 달리하는 일제강점기의 감춰진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또 대전에서 태어나 계속 거주한 90세 이상 어르신 3명을 인터뷰하였으나 그중 96세 원로기업인 한 명이 보문산 동굴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말기 대전에서 있었던 일을 추적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보문산 동굴 탐사기사를 통해 마련한 것입니다. 극소수가 남은 당대 시대를 살아간 목격자의 증언을 수집해 보도함으로써 자칫 공백으로 남을뻔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도 후 대전시청을 비롯해 지역 학계와 시민사회단체에서도 관심을 갖고 전화문의를 해왔으며, 몇몇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과 최근까지 보도된 동굴을 견학했습니다.
6. 자체평가 및 소속사확인여부
개인주택 내에 입구가 있는 동굴을 취재할 때는 해당 개인에게 동의를 구하고 동행해 취재했으며, 이의나 반론보도 요청은 접수되지 않았습니다. 96세 원로경제인을 인터뷰할 때도 인터뷰 후 다음날 그의 가족에게 연락해 보도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구했습니다. 기사에 사용된 사진은 대부분 취재기자가 촬영했고, 서울역사박물관과 논문 저자의 동의를 각각 득하고 인용한 사진도 있습니다.
7. 기타 고려사항
때를 놓치면 다시는 기록할 수 없거나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과거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이 그러한데요, 이번 취재는 중요한 때를 놓치기 직전에 그동안 모르던 역사를 찾아내는 계기를 마련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은 조만간 대전을 찾아와 보문산 일대 동굴을 조사할 예정이고, 대전시도 아직은 현황 파악 단계이나 장기적으로 전수조사와 기록화사업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외부 지원과 보도당사자의 반론신청, 언론중재위원회에의 피신청사항은 없었습니다. <끝>
회차 심사평
제400회 전체 총평
제400회 이달의 기자상에는 모두 10개 부문에 67편이 출품됐다. 5개 부문에서 8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취재보도부문에서는 3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MBC <류희림 방송통신위원장 ‘청부 민원’ 의혹> 보도는 방송사들에 대한 무더기 과징금 의결이 논란이 되는 가운데 직원 내부게시판 글을 처음 공개하는 등 충실한 후속 보도들이 이뤄진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CBS <초유의 사법부 전산망 북한 해킹 사태> 보도는 제목만 본다면 다발적으로 이뤄진 북한의 해킹 사건 중에 하나로 치부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보도는 사법부가 해킹을 당했다는 사실보다는 사법부가 해당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 사법부가 해킹 당한 사실을 숨기고 해킹 보도를 반박하고 있는 점, 보도를 통해서 사법부가 해킹 사실을 인정하게 만들었다는 점이 높게 평가됐다.
한겨레 <한신대 유학생 강제 출국 사건> 보도는 유학생들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립대학의 고질적인 문제점과 유학생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잘 지적했다는 평을 받았다. 보도를 통해서 한신대가 자신들의 실수를 감추기 위해서 유학생들에게 사전고지 없이 강제 출국시킨 반 인권적인 행동을 알린 것으로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한 보도라는 평이었다.
경제보도부문에서는 연합인포맥스 <이상한 CP시장, 기준금리보다 낮게 하루 수조 거래 外> 보도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관심 없는 일반 독자들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를 사실을 족집게처럼 짚어서, 이 문제가 한국 경제에 미치는 거시적인 영향까지 골고루 꼼꼼하게 지적한 역작이었다는 평이다. 한국 언론에서도 이 정도 깊이 있는 수준의 기사가 나온다는 평도 있었다.
이번 수상작들 중에는 언론사 간 협업 모델의 비전을 제시하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기획보도 방송부문에서는 뉴스타파·부산MBC·경남도민일보 <특수활동비 등 검찰 예산 최초 공동검증> 보도가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누더기 정보를 공개한 검찰 횡포에 맞서, 감춰진 정보들을 재판과 협업을 통해서 밝혀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신문 방송 인터넷 언론사라는 이종 매체의 협업과 재판을 통해서 정보공개 청구를 이뤄낸 것은 타 언론사에게도 모범 사례가 되었다는 평이다.
지역 기획보도 신문·통신부문에선 2편이 선정됐다. 경남신문 <우리동네 해결사>는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지역의 문제들을 발견하고 꼼꼼히 취재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생활 밀착형 문제해결 저널리즘(솔루션 저널리즘)’의 좋은 사례라는 평을 받았다.
한국지방신문협회 특별취재단 <끝나지 않은 전쟁, 기억해야 할 미래>는 9개 지역 언론사들의 협업 모델로 이뤄졌다는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 개 언론사가 커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영역을 전국의 지방 언론사들이 협업해서, 비용도 줄이면서 다양한 시점을 커버한 것은 장려할 시도라는 의견이다.
지역 기획보도 방송부문은 울산MBC <울산 민간인 학살, 누가 그들을 죽였나-눈카마스 코리아>가 수상했다. 과거의 일을 되돌아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학살 책임자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국방부로 인해서 현재에도 피해자들의 아픔이 극복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조명한 내용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월 심사를 마지막으로 2023년 한해 이달의 기자상 심사가 막을 내린다. 그동안 회원들의 격려와 함께 지적도 적지 않았다. 다만, 짧은 시간에 많은 기사들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심사위원회 활동을 통해서 새로운 저널리즘을 발굴하고 격려할 수 있었던 것은 큰 보람이었다.